▲ 정기훈 기자

한때 온갖 초록빛 작물로 발 디딜 틈 없던 저기 밭이 휑하다. 미처 거두지 못한 무, 배추 얼마간이 남았다. 새로 심은 어린 마늘과 양파가 밭고랑 한쪽을 채웠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마당에서 노랗고 붉게 피어 흐드러진 온갖 꽃나무들은 진작에 비닐하우스 안 특별한 온실로 들어갔다. 겨울 앞이다. 주위 많은 것들이 색을 잃어 간다. 아빠 팔순을 맞아서 모였으니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공들여 일군 그 밭에 늙은 부부를 위한 작은 벤치를 가져다 뒀다. 풍산개 복슬이가 모여든 사람들을 반긴다. 찰칵, 화목이 꽉 들어찬 그 사진 속 사람들은 이대로 주욱 늙지 않을 예정이다. 주름져 볼품없는 모습 찍어 뭐하냐며 평소 카메라를 피하던 두 분 사진도 따로 담았다. 다정하기를 주문하는 자식들 성화에 엄마가 아빠 팔을 잡았다. 어색했다. 참 오랜만에 분칠한 엄마 얼굴이 하얗게 보였다. 진작 색을 잃은 머리칼이 늦은 오후 빛에 반짝거렸다. 아빠만 혼자 저기 의자에 좀 앉아 보시라 했더니 순순히 가신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 뻔한 얼굴 사진이 필요했다. 너무 늙어서도, 젊어서도 어색한 그 사진 말이다. 누구도 바라진 않지만,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고 자식들 누구나가 생각했다. 무뚝뚝한 아빠는 끝내 웃지 않고 뻣뻣했다. 쓸 수는 있겠다 싶어 셔터 누르는 일을 멈췄다. 김치 택배 보낼 때나 한 번씩 전화하던 아빠가 며칠 전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 왔다. 잘 있으니 됐다, 하시며 끊었다. 이태원 참사 다음 날이었다. 울긋불긋 꽃 다 진 겨울 들머리에 흰 국화가 길에 쌓여 간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 소식에 눈 붉은 사람들이 우두커니 그 앞에 선다. 백 살까지 건강하게 사시라고 딸아이가 팔순 할아버지에게 쪽지를 썼다.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게 자기 바람 중 하나라고 딸아이가 얼마 전 말했다. 누구나의 간절한 바람이라고 나는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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