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파리바게뜨 제빵노동자에 대한 인권 유린과 노조탄압으로 유명한 SPC 계열사 사업장에서 근로감독관의 가방이 사용자에 의해 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용노동부는 진상조사를 경찰에 맡겼다고 하는데, 국가기관인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그리 신뢰할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칙으로 알고 있다. 각종 사회적 참사 진상규명에서 이미 경험한 ‘물타기’와 ‘꼬리 자르기’가 SPC 관계자가 근로감독관 가방을 뒤져 감독계획서를 촬영한 사건에도 일어날 게 뻔하다.

국가 권력과 행정기구에 대한 불신은 근로감독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를 위해 일해야 하는 근로감독관이 사용자 편에 붙어 노동자를 보호하기는커녕 해치는 사례를 자주 접한다. 관료주의에 물든 정의감 없는 공무원들에 의해 망가진 근로감독 행정 사례는 한 둘이 아니다.

중앙 권력이 썩으면, 지방 권력도 썩는다. 대통령이 썩으면 장관과 부처도 썩는다. 2014년 봄 세월호 참사가 그랬고, 2022년 가을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다. 민중의 노동 위에 타고 올라 놀고 먹는 우리 사회의 기생충들은 희생된 청춘들을 향해 놀다가 죽었다고 비아냥거렸다.

중앙 권력이 썩으면 근로감독도 썩는다. SPC가 근로감독관 가방을 턴 이유는 간단하다. SPC 사용자들이 그동안의 실무 경험과 사회적 평판에 근거해 근로감독을 우습게 봤기 때문이다. SPC 관리자들이 근로감독의 운영과 집행에서 사회적 권위와 정치적 공정성, 법률적 엄정함을 체감하고 있었다면 근로감독관의 가방을 뒤지고 공문서를 촬영해 빼돌리는 범죄 행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로감독의 권위와 평판이 왜 이토록 바닥으로 떨어진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장에서 체감하는 근로감독의 효과가 그리 높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첫째, 정확히 30년 전인 1992년 12월 노태우 정권이 비준한 근로감독 협약 81호(1947년 채택)는 근로감독의 대상을 시간과 임금과 안전보건 같은 노동기준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로감독은 민간부문의 노동조합 활동은 물론 교사와 공무원 같은 공공부문의 노사관계까지 관여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중심으로 한 개별적 노동관계만 다뤄도 벅찰 텐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의 영역인 집단적 노사관계까지 개입하면서 근로감독의 인력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둘째, 근로감독관 직위를 갖고는 있지만 현장에서 근로감독 업무를 하지 않는 공무원들이 많다. 현재 정원 3천여명 중 실제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 일선에서 근로감독 업무를 하지 않는 공무원의 감독관 지위를 회수해야 한다. 6개 지방노동청과 40개가 넘는 지방관서에서 책상물림으로 있는 관리직도 근로감독관 직위를 내놓아야 한다.

셋째, 근로감독 관련 통계가 원시적이다. 228개 시·군·구 수준의 근로감독 통계를 찾기는 어렵다. 시·군·구 수준에서 가공해 처리할 수 있는 전산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장과 사무실이 있는 지역의 현실을 고려한 근로감독 정책을 만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엄청난 국가 예산이 들어간 노동부의 ‘노사누리’ 시스템으로는 근로감독은 물론 노동행정 전반에서 228개 시·군·구 수준의 통계나 자료를 확보할 수 없는 실정이다.

넷째, 근로감독 협약이 명시한 감독관의 사업장 불시출입권이 국내 법·제도에 확보돼 있지 않다.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은 이들은 협약이 추상적이라며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협약 조항 중에 추상적인 것도 있지만 구체적인 것들도 많다. 근로감독 협약 81호의 불시감독 조항(12조1-a)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시감독권 행사를 주저하니, 예방보다는 사고 발생 후 수습작업과 후속처리에 근로감독 행정력을 낭비한다. 감독관 1명이 막을 수 있는 일을 사고 발생 후 감독관 10명이 매달리는 모양새다.

다섯째, 중앙정부에 의한 근로감독체제의 배타적 독점이다. 협약 81호는 권한 있는 당국이 여러 정부기관, 공공단체, 민간단체와 협업하라고(cooperate) 강조한다. 협약이 말하는 여러 정부기관에 지방정부가 들어갈지는 해석과 의지의 문제다. 일의 세계에서 공장과 사무실이 자리한 228개 시·군·구는 근로감독체제 구축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단위임에도, 근로감독체제에서 철저히 배제돼 있다. 또한 협약은 근로감독 정책 수립과 집행 과정에서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노사단체와 협력하라고(collaborate) 강조하지만 노동조합이 근로감독체제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노동자 안전과 사회 안전은 동전의 양면이다. 노동자 안전이 무시되는 사회가 안전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이 다치고 죽는 사고에 둔감하다. 일하다 죽는 것을 당연히 여기니 놀다가 죽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긴다. 안전한 귀환이 이뤄졌지만, 이태원 참사 며칠 전 경북 봉화의 광산에서 광부 두 명이 매몰되기도 했다.

ILO는 한국과 같은 공업국의 경우 노동자 1만명 당 근로감독관 1명을 둘 것을 권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근로감독관 충원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우리나라의 근로감독관수는 3천여 명에 육박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쓸 수 있다.

근로감독 협약 81호 비준 30주년을 맞았지만, 근로감독이 협약의 취지와 정신을 상실하고 관료주의 행정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당연하게도 자본가들은 근로감독을 귀찮게 여기고 우습게 느끼고 깔본다. 이런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SPC 계열사 사용자들이 근로감독관 가방을 털겠다는 마음을 쉽사리 먹고 그 범죄 행위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SPC의 범죄 행위는 이태원 참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