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다혜 변호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사고 직후 그 설비를 모두 멈출 필요가 있었을까요?”

중대재해로 사망한 노동자의 동료가 증인으로 나온 재판에서 어느 판사가 한 질문이었다. 검사와 변호인이 질문하는 내내 주눅 든 사람처럼 소극적으로 답변하던 동료 노동자의 목소리가 유일하게 높아졌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사람이 죽은 곳 아닙니까.”

사고가 왜 발생했는지 조사하고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안전점검과 필요한 조치가 이행되기 전이었다. 심지어 참혹한 사고 현장이 채 수습되기도 전이었다. 노동자의 몸이 끼여 해당 설비가 멈추자, 회사는 혹시라도 생산에 지장이 있을까 바로 붙어 있는 옆 설비 가동을 지시한 사건이었다. 많은 재판 가운데서도 그날 법정의 언어와 판사의 무표정한 얼굴, 방청석에 앉은 유족과 노동자들의 무거운 탄식이 유독 선명히 마음에 남았다.

SPC그룹 계열 빵공장에서 샌드위치를 만들던 청년노동자가 소스 배합기에 몸이 끼여 사망한 사건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사고 발생 당일 해당 기계에 흰 천을 씌운 채 생산을 재개했고, 시민들의 분노가 일자 뒤늦게 고용노동부 권고에 따라 작업을 중지했다. 중대재해가 적지 않게 일어나는 사업장이었고 주야 교대근무, 특별연장근로를 통해 24시간 쉬지 않고 빵을 만드는 곳이었다. 이번 사건에서도 보듯이 통상 사고를 가장 먼저 인지하고 피해 노동자를 발견하는 이는 동료 노동자다. 최초 구조와 수습도 마찬가지로 함께 일하던 이들의 몫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의 지시대로라면 눈앞에서 죽음을 경험한 곳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그 일을 계속하게 되는 것인데, 적어도 일상의 일터는 전쟁터와 달라야 한다.

법원은 빵을 만들던 청년노동자의 죽음과 그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까. 수많은 시민이 불매운동에 동참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이 높은 사안이니, 법원도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제대로 이해할까. 문제는 앞서 언급한 판사의 질문은 산업안전보건법상 노동부의 작업중지 명령과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같은 제도를 몰라서 나온 게 아니라는 점이다. 감히 짐작건대 노동자의 일터가, 공장이, 발전소가, 공사장이, 조선소가, 철로가, 물류창고가 정말 어떤지 몰라서, 그곳에서의 노동이란 어떤 현실을 가리키는 것인지 판사는 몰랐으리라 생각한다.

한참 멀리 떨어진 공간과 인식하의 일터, 언론이나 다양한 매체를 통틀어도 좀처럼 널리 기록되지 않는 구체적 현실, 무엇보다 경제성장·산업발전·경영실적·생산량·수익성 따위의 언어가 우리의 일상을 촘촘히 채우며 상식이 되는 동안 낯설어진 노동의 언어, 이에 자연스럽게 바탕을 두게 된 재판. 그 결과 노동자의 몸과 삶을 대가로 굴러가는 일터를 바라보는 법원의 인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상이 된 것 같다. 산업안전보건범죄에 대한 가벼운 처벌과 극히 드문 실형 선고, 그로 인한 높은 재범률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됐지만 법원이 이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오히려 합의·배상·처벌불원·반성 등을 사실상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양형 이유로 고려하면서, 안전보건범죄에 대한 법원의 온정주의가 재판 실무에서 목격된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게다가 반복적으로 범행을 저지르거나 동종 전과가 있는 사정은 분명 형을 가중하는 양형기준임에도 우리 법원은 최초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시 가벼운 처벌을 한 후 이를 이유로 다음 범죄에 대해서도 감형을 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법원은 A기업의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의무 위반에 대해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는데 3년 후 재차 동종의 의무위반으로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 대해서는 벌금 500만을 선고했다. 또 다른 안전조치의무위반치사 사건에서 법원은 과거 이미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인한 사망 재해에 대해 벌금형을 선고받은 범죄전력이 있는 B업체 대표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위 두 사건 모두 “벌금형을 넘어서는 전과가 없다”며 기존의 범죄전력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정으로 고려됐다.

그 외에도 법원은 피고인이 속한 회사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거나 경제위기 상황에서의 책임을 언급하며 너그러운 처분을 하기도 하고, 당연히 가입해야 하는 산재보험에 가입했다거나 근로복지공단이 공적기금으로 산재보험 급여를 유족에게 지급한 사정을 이유로 들어 엉뚱하게도 피고인을 감형하는 판결을 하기도 한다. 사안의 중대성은 날로 크고 무거워지고 있는데 법원의 언어는 이를 설명해 내지 못하고 동떨어져 가는 듯하다.

과거 법원 내 한 연구모임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동안은 ‘모른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면 이제는 ‘몰랐으니까 알아야겠다’는 마음”이라고 밝힌 언론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아직은 관련 재판에 있어 여러 노력이 여전히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 판사들이 “재판을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 돌아본다는 점이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고 세상에 당연히 이해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일터의 안전과 보건, 노동자의 건강을 다루는 재판에서도 같은 식의 고민과 공부가 필요하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일터와 재해의 실상을 인식하는 다양한 자리가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중대재해 재판을 함께 돌아보고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과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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