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유기념사업회출범식

일제강점기 항일혁명가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 옥중에서 숨진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 출범식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다.<본지 8월26일자 12~13면 ‘이재유 기념사업회 추진 속도 붙는다’ 기사 참조>

기념사업회를 준비해 온 발기인들은 17일 취지문에서 “이재유 선생은 노동자 투쟁을 중심으로 민족해방 투쟁을 이끌었다”며 “혁명적이었던 만큼 민족적이었고, 민족적이었던 만큼 민중적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대중과 함께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진정한 민중의 세상’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기념사업회를 준비한다”고 덧붙였다.

기념사업회 준비위원에는 김금수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상임고문,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최승회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이사장, 김명환 전 민주노총 위원장, 김동만 전 한국노총 위원장 등 노동·시민단체를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2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25일 준비위 출범식에서는 △이재유 선생의 삶 소개 △발기인모임 경과보고와 각계 격려사 △준비위 구성과 사업계획 승인 등의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1905년 함경남도 삼수에서 출생한 이재유는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에 참여, 공산주의 운동가로 성장했다. 1928년 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돼 조선으로 호송된 뒤 3년6개월간 수형생활을 했다. 1933년 출소 뒤 이현상·김삼룡·정태식과 함께 노동현장을 기반으로 한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해 활동했다. 1934년 경찰에 체포됐다가 탈출에 성공한 뒤 은신과 변장술로 번번이 검거망을 뚫어 신문 지상에서 ‘신화적 인물’로 보도되기도 됐다.

이재유는 1936년 6월 조선의 절대 독립,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을 목적으로 조선공산당 경성지방협의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그해 12월 체포돼 징역 6년형을 받았다. 1942년 9월 형기가 만료됐으나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소하지 못하고 청주보호교도소로 이감됐다. 고문 후유증이 심해져 해방 1년 전인 1944년 10월 40세의 나이로 끝내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이재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준비위는 출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준비위원 참여자를 확대해 나갈 예정이며, 내년 상반기 중에 기념사업회를 발족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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