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또 하청노동자들이 죽었다. 대전 현대아울렛 화재로 시설관리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과 물류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이 희생됐다. 모두 하청노동자들이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현장을 찾아 사과문을 발표하며 “무거운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청인 현대백화점과 그 경영책임자인 정 회장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조금씩 원청의 의무를 강화해 왔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역시 원청의 의무와 책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그 법적 정의가 구현되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아울렛 참사에서도 고용노동부와 사법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처벌 대상은 어디까지인지, 원청의 실질적 책임과 구체적 의무위반은 무엇이었는지 ‘면밀히’ 검토할 것이다. 또 한번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자. 피눈물이 날 정도로.

이처럼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누구라도 원청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에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정부와 여당이 앞장서서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하려고 혈안이 돼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눈을 조금 돌려보자. 목숨을 잃고 중상을 입은 노동자들에게로 말이다. 쟁점이 되고 있는 ‘지난 6월의 소방점검 결과 24건의 지적사항’을 과연 하청노동자들은 알고 있었을까? 자신들이 일하는 곳에 당장 불이 나도 경보기도 소화설비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알려 주기라도 했을까? 어쩌다 알게 됐다 하더라도 당장 고쳐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 요구해야 했을까? 하청업체 사장에게? 원청에게? 그들이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하청노동자들은 작업중지라도 할 수 있었을까?

산업안전보건법은 63조에서 도급인의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고, 64조에서 도급에 따른 산재예방조치로 ‘안전 및 보건에 관한 협의체’를 구성하고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협의체에 하청노동자가 앉을 자리는 없다. 원·하청 사용자들만 모여서 협의하면 그만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어떤가? 5조에서 ‘도급, 용역, 위탁 등 관계에서의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시행령으로 내려가면 여기에도 노동자들이 설 자리는 없다. 그나마 ‘종사자의 의견을 듣는 절차’를 마련하라고 명시돼 있지만 이마저도 산업안전보건법 64조 ‘안전 및 보건에 관한 협의체’로 갈음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권리라고는 그저 한 사람의 ‘종사자’로서 안전점검에 참여하고 의견을 말할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제철 당진공장에서는 최근 두 달 새 안전사고만 30건 넘게 발생했다. 이에 금속노조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는 지난 7월 발생한 2건의 사고조사와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원·하청 TFT 구성을 요구했다. 원청 현대제철의 입장은 간단했다. 한 건의 사고는 교통사고로 조사대상조차 아니며, 다른 한 건의 사고에 대해서는 원청과 협력업체 대표·현장소장·안전관리자가 참여하는 사고조사위원회를 열었고, 하청업체 노동조합은 사고조사위 참여주체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심지어 과거에 현대제철, 협력사, 원·하청노조 등 19명이 참여한 TFT가 운영됐던 전례가 있는데도 이제는 원·하청이 진행하는 TFT는 없다고 부정했다. 올해 3월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가 원청의 교섭불응에 대해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제기하자 중앙노동위원회는 “산업안전보건 의제에 한해 사내하청 노동자의 교섭요구에 응하라”고 판정했다. 하지만 현대제철은 이러한 중노위의 결정마저도 무시하다가 하청노동자들이 한 달이 넘도록 투쟁한 뒤에야 지난달 말 원·하청TFT를 받아들였다. 법이 온전히 보장해 주지 못하는 하청노동자의 권리를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보장받은 소중한 결과물이다. 수동적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아니라, 반쪽짜리 참여할 권리가 아니라, 안전문제를 안건으로 원·하청 사업주와 대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하청노동자들의 안전의제 교섭권이 이리도 얻어 내기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이 원청사업주(도급인)의 안전보건 확보의무를 명시하고 있는데도 하청노동자들의 사고와 죽음은 끊이지 않고, 그 의무에 따른 원청처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원청사업주의 의무’에 조응할 ‘하청노동자의 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집단적 노사관계의 기본룰을 정하고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 하청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권리가 빠진 사업주의 의무는 반쪽짜리다. 노동자들을 바라보지 않고 사업주의 책임을 검토한 결과는 공허할 뿐이다.

이제라도 이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기 위한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노조법 2·3조 개정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모아지고 있다.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3조 개정을 통해 노동조합의 실질적인 쟁의권을 확보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미 많은 노동자들을 살해한 손배·가압류가 더 이상 노동자들을 죽이지 못하게 만드는 투쟁이다. 나아가 노조법 2조 개정으로 원청의 사용자성을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은 반쪽짜리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을 하청노동자들의 교섭권에 기반해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눈물마저 말라 버릴 듯한 통곡의 벽인 위험의 외주화, 죽음의 외주화를 진정으로 넘어설 큰 걸음을 함께 내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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