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연구원장

불평등·양극화 해소,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법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연구회도 만들어지고, 전문가 간담회, 토론회가 이어지면서 다양한 제안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익숙한 논쟁 너머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클린턴의 캠페인 구호로 유명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빌려서 말하자면 “바보야, 문제는 기업별 노사관계 시스템이야!” 라고 말하고 싶다.

‘재벌 중심 경제체제, 비정규직 고용 확대’ 등이 불평등 확대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고 있지만 노사관계 측면에서의 접근은 질적·양적으로 매우 부족하다.

이와 관련해 그동안 두 개의 편향이 존재해 왔다. 하나는 문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노사관계의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두고 부분적·대증적 해법에만 골몰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귀족노조론처럼 노조 때리기를 통해 조직노동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회피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현행 노동법은 노조를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싸우되 기업 안에서만 교섭과 투쟁을 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런 법과 제도하에서 노조가 조직돼 있는 소수의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는 투쟁을 통해 노동조건이 향상됐지만 노조 결성이 어려운 다수의 중소·영세 미조직 노동자들은 스스로 교섭을 통한 요구 해결이 불가능했다. 정부의 시혜적 노동복지정책도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해 부익부 빈익빈을 더욱 키웠다.

후자, 노조 때리기는 무능한 정부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문제 해결은커녕 노정 갈등만 키울 뿐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논의가 그동안 조직노동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양대 노총도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비록 노조 조직률이 14.2%로 유럽 국가 절반 수준에도 휠씬 못 미치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조직률이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나라다. 양대 노총에는 공공·민간 포함 주요 산업과 주요 기업에 다수의 노조가 조직돼 있고, 노동조합 조합원 숫자가 무려 280만명이다. 한국 사회 최대 조직화된 집단이다. 이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면서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법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는 집중화되고 조율된 단체교섭구조가 노동시장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한다는 연구 결과를 여러 차례 발표한 바 있다. 조직노동 특히 산별노조들은 불평등·양극화 해법으로 초기업·산업별 교섭이 가능하도록 법 개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노동현장은 보건과 금융·금속·서비스·공공부문 등에서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초기업·산업별 교섭이 진행되고 있고 구체적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더 확대되고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이제 정부와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는 초기업·산업별 교섭에 사용자단체가 나서도록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노동위원회는 집단 조정을 위한 교섭단위 통합절차를 모색하고, 국회는 사용자들이 산업별교섭에 응할 수 있는 다양한 법제화와 함께 유명무실한 단체협약 효력 확장제도를 실질화해야 한다.

집단적 노사관계 시스템 개혁 없이 개별적 노동의제, 현안 중심 투쟁은 부분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초기업·산업별 노사관계 구축은 ‘원 오브 뎀’(여럿 중 하나) 그 이상의 노동개혁 핵심 과제임을 감히 말하고 싶다.

기존 어용노조-민주노조, 한국노총-민주노총 대립구도는 정의로운 산업전환을 이루고 기후위기·불평등을 극복해야 하는 현 시기에 더 이상 건강한 긴장관계로 발전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기업별노조냐, 산업별노조냐’ ‘기업별교섭이냐, 산업별교섭이냐’는 새로운 구도를 전면화해야 한다. 정당과 국회도 그때그때 노동이슈 따라가기식 지원활동, 닥치고 지지·묻지마 지지를 중심으로 친노동 여부를 다투지 말고 한국 사회 갈등 구조의 정중앙에 있는 노동문제를 푸는 본질적 해법으로 기업 담벼락에 갇혀 있는 노사관계의 사회화, 교섭구조 개혁에 눈을 돌렸으면 한다.

모두가 알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성과가 가시화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당장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해서 재미가 없는 의제지만 모든 노동자와 함께 진정으로 불평등·양극화 해소를 위한 노동개혁을 하고 싶다면 단 하나 이 의제를 통한 일점 돌파를 권한다. 그래서 나는 최근 들어 가장 구성이 잘 됐다고 평가되는 21대 국회 후반기 환경노동위원회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비록 윤석열 정부지만 노동조합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이 소신대로 이것만은 꼭 추진했으면 좋겠다. 한국 자본주의 불평등 사회에서 <기생충>과 <오징어게임>같이 세계를 감동시킨 ‘K 콘텐츠’가 나왔듯이 노사관계에서도 한국의 불평등 양극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국형 초기업·산업별 노사관계 새판 짜기, 이름하여 ‘K 노사관계’를 함께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27일 국회에서 열리는 ‘불평등 양극화 근본적 해법 모색-초기업·산업별 교섭’ 토론회가 그 출발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