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법 없이도 살 사람, 선량하기 이를 데 없어 타인과 사회에 어떤 해악도 끼칠 뜻 없이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편으로 법이 있어도 오로지 나만이 중해 힘과 속임수로 빼앗기를 일삼는 사람들도 많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 법이 있어도 피해받는 일이 없어야 하기에 시대에 맞게 법을 다듬고 벼려야 하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이들을 국민들의 직접투표로 선출하는 이유고, 법을 집행하고 적용하는 이들의 공정과 청렴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다. 2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은 유권자 14만6천명당 1명 꼴이지만 그중 법조인 출신은 전체 국회의원 300명 중 46명(15%)을 차지했다.

법을 만드는 측면에서 보자면, 의안정보시스템상 지난 20대 국회에서 2만4천141건의 법안이 발의됐다. 어떤 형태로든 법률에 반영된 경우가 8천799건이었다. 현 국회에서는 이미 1만6천923건의 법안이 제출됐고 그중 4천559건이 법률에 반영됐다. 20년 전 16대 국회에서 2천507건이 발의돼 1천579건이 반영된 것과 비교하면 가히 폭발적인 증가다. 입법의 홍수시대라 할 만하다.

이 많은 법들 중에서 노동자와 시민·국민들이 취지와 뜻을 새겨서 살펴봐야 할 것들을 가리고 공론의 장에 올려 다듬어 통과시킨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한편으로 법치를 끊임없이 외치던 검찰(사법연수원 23기) 출신이 역시 법률가였던 전임자(사법연수원 12기)를 이어 대통령이 됐다. 집권 초부터 국기 문란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대통령이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중용한 이들 역시 법을 알고 칼처럼 쓰던 검찰 출신들이었다. 검사 전성시대의 도래다. 한편 지난 7월 경제정의연구소가 바뀐 정부의 첫 내각 고위공직자 및 기관장들의 프로필을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 ‘윤석열 정부 기재부 출신 관피아 권력 지도’에 따르면 관피아 중 기획재정부 출신이 12%로 가장 많았다. 기재부의 나라라 할 만하다. 판·검사도, 기재부 관료도 다들 대형 로펌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로펌에서 판사로, 공수처 검사로, 고위직 관료로 돌아온다. 그들은 언제든 국회에 진출할 채비도 갖추고 있다. 기업들은 로펌에 돈 보따리를 안긴다. 입법의 홍수시대, 검사 전성시대, 기재부의 나라, 시나브로 법과 돈의 동행이다.

법 없이도 살았을 노동자가 법이 있는데도 위험천만한 일을 하다 홀로 죽어 갔다. 이를 계기로 죽은 노동자의 이름을 딴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법 없이도 살 사람만큼이나, 법을 통해 단죄하거나 적어도 조심하고 경계하게 만들어야 할 이들이 많았던 탓이다. 안전보건에 있어서 CEO의 의지와 경영방침이 핵심적이라는 것은 교과서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기업에게도, 사장님·회장님들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했다. 시대에 맞춰 변하지 못한 산업안전보건법과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해석하고 적용해 온 행정·사법 관행의 한계 탓이었다. 그래서 안간힘을 써서 만든 것이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다. 이 법의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그리고 정권이 바뀌고 경총을 중심으로 법 취지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말하고, 손가락이 아프도록 쓰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던 와중에 난데없이 기재부가 등장했다. 나랏돈의 곳간지기를 자처해 왔던 기재부가 자기 소관도 아닌 법령에 대해 연구용역을 내고 공개도 하지 않을 보고서를 만들도록 헛돈을 쓴 것부터가 자가당착적이다. 한술 더 떠 이런 정체불명의 보고서에 기반해 소관부처인 고용노동부에 소위 ‘(중대재해처벌법)시행령 개정방안’이랍시고 문서를 전달하는 월권을 저질렀다. 가히 국가 기강 문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양대 노총은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보도에 따르면 기재부의 방안에 안전보건최고책임자가 사업장의 안전·보건에 관해 최종 의사결정을 한다면 경영책임자로 본다거나, 사업주가 사업장 안전·보건에 관한 인증을 받으면 중대재해처벌법상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는 내용이 포함돼 있고, 이는 이른바 ‘재계의 소원수리’ 같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바야흐로 법과 돈의 노골적 동반시대를 열 심산인 듯하다.

기재부만이 아니다. 경제 성장, 효율과 경쟁력, 일자리 창출을 앞세우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이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이해를 대변해 왔던 정부 부처들은 많다. 그런 와중에 노동은 점점 더 양극화되고, 위험은 주변부로 흘러 모이고, 부지기수의 노동자들이 죽고 다쳤다. 노동부는 홈페이지에서 노동존중 사회 실현, 차별 없는 일터 조성,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 조성을 약속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이 나오면 노동부가 어디에 서 있는지 평가받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경제정의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현 정부 내 고위공직·기관장급 직위 533개 중 기재부는 65개(12.2%)를 점유했지만 노동부는 5개(0.93%)뿐이다. 기재부와는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이미 무척 고단하고 힘겹다는 이야기도 들려 온다. 노동부 행정관료 출신으로는 고위공직이나 기관장으로, 대형 로펌이나 기업, 심지어 국회로도 갈 길이 난망한 현실은 자존감이라는 전투력을 앗아갈 수 있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노동부를 응원한다. 중대재해처벌법만이 아니라 ‘노란봉투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동등한 중앙행정기관으로서 자존심을 걸고 법과 원칙, 당위에 기반해 쟁투를 벌여 줘야 한다. 거듭 바라건대 높아진 사회적 인식과 여론을 뒷배 삼아야 한다. 노동부 장관이야말로 경력으로 따지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 노동자들의 권리와 생명·안전·건강에 대해 소관 부처로서 상식적 관점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직을 걸고라도 싸워야 한다. 지지 않기를 기원하지만 최소한 졌지만 잘 싸웠다고 이야기해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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