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최근 자문을 하고 있는 노동조합을 통해 모 회사에서 계획 중인 새로운 안전관리제도의 초안을 살펴본 일이 있었다. ‘안전관리 3OUT 제도’라는 이름의 새로운 안전관리제도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안전사고가 발생하거나 안전기준을 위반하는 일이 발생하면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관련자들의 책임 여부를 판정한다. 여기서 판정된 과실 여부와 정도에 따라 인사위원회를 개최해 감봉·정직·해고에 이르는 징계에 처한다. 추가적으로 징계를 당한 노동자는 인사등급을 하향적용하고 해당자가 속한 부서는 무재해평가에서 감점을 받는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기업들의 대응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사고가 발생해도 처벌을 면하기 위해 법이 정한 의무를 형식적으로라도 갖추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이 회사의 선택은 가히 극단적이다. 노동자들에게 칼을 빼들고 ‘사고 나면 같이 죽는 거야!’라고 외치는 모습이라니. 과연 이 극단적인 선택은 효과가 있을까?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이 계획이 얼마나 무리수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판단의 주체인 조사위원회 구성은 일찌감치 산업안전보건위원회나 노사합의는 건너뛰고 안전팀과 관리자들로만 구성된다. 가장 이해가 어려운 것은 노동자의 과실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계획에 따르면 고의에 의한 사고, 작업허가서 미발행, 작업안전절차 미이행, 안전보호구 미착용, LOTO(lock out·tag out) 미실시 등의 위반사항은 노동자 과실을 50% 이상으로 판단한다. 설비 결함·교육 미수료·환경 및 기상을 고려하지 않은 작업, 소음으로 인한 의사소통 미흡 등은 50% 이하의 과실로 판단한다. 여기에 더해 재해로 인한 피해 정도나 피해 금액에 따라서도 징계의 수준은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자비 없는 3OUT 제도는 징계대상자를 가해자·재해자·관리감독자로 나누고 심지어 재해자 본인도 징계를 피할 수는 없다. 이쯤 되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앞서 열거한 기준들 대부분이 모호하기 짝이 없거니와 작업허가서·작업안전 절차·LOTO 등의 사안은 작업자의 권한을 넘어선 것으로 개인의 과실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설비의 결함이 어떻게 작업자의 과실이 되는지, 교육을 안 받은 사람을 작업에 투입한 책임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지 모든 것이 혼돈의 도가니였다. 설사 이 계획이 실행돼 노동자들이 징계를 받는다 하더라도 거의 모든 사안이 부당징계로 판단될 것이 분명했다.

사실 이 계획의 근본적인 문제는 판단 주체의 부적절함, 판단 기준의 모호함, 재해자까지 징계한다는 불법성 이전에 ‘산업재해는 노동자의 책임’이라는 낡아 빠진 인식 자체에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재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노동자 개인의 실수나 과실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한 책임, 나아가 재해를 예방할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것은 산업안전보건에 대해 우리 사회, 나아가 인류가 쌓아 온 원리와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 원칙이란 ‘노동자의 안전 및 건강의 유지·증진’을 사업주의 의무로 정하고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그리고 이 의무가 근로계약에 따라 당연히 발생하는 사업주의 안전배려의무에 기반한다는 일반적 법리다. 이에 더해 ‘이익이 있는 곳에 책임이 있고, 위험을 만드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원칙에 기반해 고의나 과실이 없더라도 발생한 피해에 대해 기업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무과실책임주의’ 등이 산업안전 관련법령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원리·원칙을 무시하고 한 사업장에서만 통용되는 법을 만들어 노동자의 과실을 산정하고 징계까지 하겠다는 계획은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그러나 기어이 강을 건너 자기들만의 세계로 가 버린 기업의 뒤를 따라 국회의원·학자·법률가들이 모여 똑같은 주장을 펼치는 장면을 목도하고야 말았다. 지난달 29일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이 주최하고 바른사회시민회의가 주관한 ‘중대재해처벌법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토론회’다. 토론회 참가자들 주장의 핵심은 노동자의 과실을 따져 경영책임자 면책조항을 중대재해처벌법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노동자의 과실을 책정해 일정 수준 이상의 과실이 노동자에게 있으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의 형사책임을 면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행동의 박인환 변호사는 이를 일컬어 ‘근로자의 무과실 원칙’이라는 신박한 표현을 했다고 한다. 일개 기업의 일탈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바로잡으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국회의원과 학계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법의 근간을 모조리 뒤집어엎는 주장들이 난무하는 장면은 누가 볼까 부끄러울 지경이다.

법률가에게 법리를 논하는 것은 주제넘는 짓일 테니 산업안전보건의 관점에서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토론회 참가자들이 근거로 내세운 실태조사에서는 중소제조업 504개사에서 산업재해 발생원인의 80.6%가 ‘근로자 부주의 등 지침 미준수’라고 답했다고 한다. 어쩌면 좀처럼 줄지 않는 중대재해는 재계와 자칭 전문가들 사이에 팽배한 구시대의 안전관리방법론 때문이 아닐까? 재해의 책임을 노동자의 과실에서 찾는 것은 그 의도를 떠나 백해무익한 일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결론 내리는 순간 강구할 수 있는 재발방지대책이라고는 노동자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교육하고 강제하는 것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실수를 하며 그것마저 막을 방법은 없다는 걸 알기에 실수를 해도 사고가 나지 않도록, 사고가 나도 다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안전보건관리다. ‘작업자 부주의’만 들먹이는 사람은 안전보건관리를 이미 포기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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