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건강하게 일할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산재 인정률이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에게 엄격하고 높은 잣대를 적용해 부당한 불승인이 반복하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노동건강정책포럼 소속 전문가들이 산재보험 승인 과정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해결책을 제시한다.<편집자>
 

이종란 공인노무사(노동건강정책포럼)
▲ 이종란 공인노무사(노동건강정책포럼)

근로복지공단 경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또다시 반도체노동자의 파킨슨병을 불승인했다. 벌써 세 번째다. 재해자는 올해 초, 만 30세의 나이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삼성반도체 평택공장에서 사내협력업체 소속으로 설비유지보수 업무를 한 지 3년8개월 만에 발병한 것이다. 설비 내부 작업 중에 분진도 날리고 냄새도 심했다. 에틸렌글리콜(유기용제 일종)이 함유된 냉각제가 담긴 비닐봉지가 터져 온몸이 젖기도 하고, 시간에 쫓겨 표준작업서와 달리 고온 상태로 작업하는 등 위험작업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파킨슨병이 발병했다고 생각해 반올림을 통해 산재를 신청한 것이다.

준비과정에서 모 대학병원에서 소변검사를 했다. 그 결과 일반인에게 검출되지 않는 무기비소가 적지 않게 검출됐다. 의사는 비소노출과 일산화탄소 등 유해가스의 복합노출 가능성과 가족력이나 개인적 위험요인이 없다는 점 등을 토대로 업무관련성이 상당하다는 평가서를 줬고, 재해자는 이를 공단에 제출했다.

그러나 공단은 역학조사를 생략하고 별다른 조사도 없이 경인질병판정위에 사건을 회부하더니 납득하기 어려운 아래와 같은 사유로 불승인했다. 판정문에 따르면 “△여러 화학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으나 노출 기간이 길지 않고, 파킨슨병 간의 관련성이 알려지지 않았고, △업무상 고농도 비소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나 객관적 사실을 확인할 수 없고, △비소노출과 파킨슨의 의학적 관련성이 확인된 바 없다”는 이유다. 한마디로 의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인질병판정위 판정은 산재보험의 취지를 망각한 부당한 판단이다. 법원은 일관되게 업무와 질병 간의 상당인과관계는 의학적, 자연과학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재해노동자 권리보호라는 산재보험의 취지를 고려한 규범적 인과관계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게다가 반도체노동자의 파킨슨병에 대해 이미 두 차례 경인질병판정위가 불승인 판정을 내렸으나 법원에서는 작년에 이어 올해 초에 모두 산재로 인정했다. 법원은 반도체 공장에서 유기용제에 노출되어 젊은 나이에 상병이 발병했고, 파킨슨병은 희귀질환으로 발병 사례가 많지 않고 역학적 연구가 수행되기 어려워 발병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을 뿐, 의학적 과학적 증명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인과관계를 쉽게 배척해선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렇게 두 번이나 같은 사례가 법원에서 산재 인정을 받았음에도 경인질병판정위는 어떤 반성도 없이 똑같이 의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또 불승인한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가장 유해한 업무를 수행한 협력업체 노동자의 사례다. 그런데도 공단은 유해물질 노출 관련 어떤 조사도 하지 않은 채, “객관적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며 재해노동자가 제출한 업무관련성 평가서의 증거능력을 무시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경인질병판정위원장은 당사자의 진술권마저 심각하게 침해했다. 불편한 몸으로 최후진술을 위해 참석한 당사자 앞에서 한 판정위원은 심의 도중 개인적 전화를 큰소리로 받았으나 위원장은 달리 제지하지 않았다. 위원장이 제지한 건 당사자의 최후진술이었다. 3분이 길다고 당사자의 말을 잘라버렸다. 아픈 노동자에 대한 예의도, 권리보장도 생각지 못하는 경인질병판정위의 태도는 결국 불승인으로 이어졌다.

2017년 대법원에서 첨단산업분야에서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된 노동자에게 희귀질환이 발생한 경우 산재보험의 취지를 고려해 전향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상당인과관계 판단기준’이 나왔고, 벌써 5년이나 됐다. 그럼에도 이번 사례처럼 질병판정위에서 불승인돼 또 재판을 하러 가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질병판정위가 여전히 규범적 판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질병판정위 구성은 의사 판정위원이 다수이고, 의학적 기준에 치우쳐 있다. 통계적으로도 신청자의 3분의 1이 불승인되는 질병판정위 판정을 두고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할 수 없다. 일하다 다치고 병든 노동자들이 사회보험 바깥으로 내몰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산재제도 개혁, 질병판정위 개혁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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