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며칠 전 언론을 통해 지난 6월30일에 작성된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 집회 및 시위 입체분석’이라는 제목의 대통령실 문건이 폭로됐다.

해당 문건은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집회를 여는 주체를 시민단체와 노동조합 둘로 구분했다. 전자는 ‘권력 비판’의 성격을, 후자는 ‘권리 요구’의 성격을 갖는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주목해야 할 쟁점으로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의 결합”을 지적하고,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의 연결을 차단하는 대응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1일, 해당 문건에 적시된 민주노총·참여연대·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 등은 대통령 집무실 앞 기자회견에서 “근거 없는 음해와 정부 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진영에 대한 분열 조장과 갈라치기”를 규탄했다. 충분히 할 만한 비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진지하게 대응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해당 문건은 꽤 그럴듯한 독재정부 치하 ‘공안 문건’처럼 보이지만, 사회운동 상황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해당 문건에서 언급하고 있는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와 2016년 탄핵촛불은 집권세력이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가운데, 급기야 극소수 엘리트들의 기만을 드러내는 우연적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발생했다. 사회운동의 집권세력 비판과 대중적인 불만이 조우하면서 대중 시위가 확산하고, 이미 레임덕에 다다른 집권 세력이 결정적인 수세 국면으로 내몰렸다.

가령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은 1년여 전부터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났던 집권세력의 정치적 위기가 ‘태블릿 PC’라는 도화선에 불이 붙으며 일어났다. 촛불 1년 전 열린 민중총궐기에 참석했던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300일 넘게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가 사망했다. 이는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는 교육부 고위관료의 망언 사건과 대학의 기업화와 맞물려 발생한 이화여대 시위 같은 사건들을 거치며 전 사회적 불만으로 확산했다.

그러나 2008년과 2016년의 대중 시위가 그 자체로 사회운동의 유능함을 가리키진 않는다. 오히려 두 사건을 통해 시민단체들과 노동조합은 자신의 결점과 위기를 확인했다. 가령 시민운동은 박근혜 퇴진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권 시기에 ‘비판자’로서의 자기 위치에 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상근활동가들의 전문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민단체들이 문재인 정부의 실책을 정당하게 비판할 땐 문재인 열성 지지자들이 후원을 끊었고, 조국 사태 등에 대해 덜 비판적일 때에도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이 실망해 후원을 끊는 등 민감한 정치쟁점에 혼돈을 겪은 것이다.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성역 없이 비판하고자 할 때조차 회원 체계가 흔들렸다.

유명 시민단체들을 “친민주당”이라 비판하는 것은 단체에 속했던 일부 대학교수나 변호사들이 청와대로 들어가는 과오를 보였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하지만 실제 시민운동이 마주한 위기를 총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특정 정치인이나 인플루언서에 대한 팬덤문화가 시민단체 후원회원들의 정서까지 잠식하면서, 시민운동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시민운동이 돌파해야 하는 과제는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날카롭게 다듬고, 그것을 회원 모두의 것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후원자들을 블랙컨슈머나 팬덤의 일원으로만 남게 하는 운동은 그 한계를 명백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MB·반박근혜 전선 이후 민중운동의 ‘합의된’ 프로젝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MB·반박근혜 전선이 사라진 문재인 정부 시기, 시민사회운동 일각은 문재인 정부 수호 내지 동행을 통한 ‘개혁 과실 따먹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실패의 상징이 선거제도 개혁 과정과 조국 사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올해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 결과는 혹독한 교훈을 던져 줬다. 이는 사회운동의 역량과 비전이 부재했던 것, 2008년 이후 시민사회운동의 주류가 ‘반MB·반박근혜 전선’에 함몰돼 있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니 다시 ‘반윤석열 전선’ 같은 것을 복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회운동을 한참 더 뒤로 후퇴시킬 따름이다.

노동조합 역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오랜 프로젝트의 실패를 목도하고 있다. 이 실패의 궁극적인 원인은 정치사업을 ‘진보정당’에게 외주화했다는 점에 있다. 정치는 당이, 경제는 노조가 담당하는 전술이 습관화하면서 노동조합 안에서의 정치사업은 방향을 잃었다. 민주노총은 10년 넘게 유사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을 뿐, 과오를 넘어설 새로운 대안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최근 다시 통합론과 선거연합정당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장기간 조합원이 주체로 선 정치사업이 부재한 채로 추진되는 통합은 잘 해 봐야 민주노동당만 못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 썩어 가는 토대를 그대로 두고 땜질만 하는 처방은 심각한 오류를 재현할 위험이 높다.

그럼에도 ‘비전 없는 좌파’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반헤게모니 블록을 구축하는 기나긴 여정은 불가피하다. 사회운동이 오래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밝히려면 각자의 곤경에 빠져 있는 운동들이 서로 연결돼야 한다. 대통령실의 ‘입체분석’ 문건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그간 시민단체들이 권력 비판을 제대로 했기 때문도, 노동조합이 권리 요구를 충분하게 해 냈기 때문도 아니다. 정치에서의 권력 비판은 노동권의 확장과 무관하지 않고, 일터에서의 권리를 확장하고 노동자들의 힘을 키우는 일은 정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플랫폼C 활동가 (myungkyo.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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