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작업복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꽃다지 <늙은 노동자의 노래> 중에서)

이택주 한국노총 공무원·교원위원회 전문위원이 최근 펴낸 개정판 노동소설집 <늙은 노동자의 노래>(레이버플러스·2만원·사진) 중 단편 ‘늙은 노동자의 노래’ 속 주인공 서씨가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받아든 유인물에 적힌 노래 가사다. 서씨는 노래 가사를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이 살아온 삶과 현재의 처지가 노래 가사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늙어서도 노동을 해야 하는 일당 3천400원짜리 인생, 천대받는 늙은 노동자.

늙은 노동자 서씨와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이택주 작가가 1986년 발간한 소설집을 36년이 지난 2022년 개정판으로 다시 펴냈다. 사실 그는 ‘작가’보다는 한국노총 경기본부·고무노련·섬유노련·서울본부 간부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그가 1976년 등단한 작가이자, 70~80년대 반도상사노조·대우자동차노조에서 민주노조운동을 하다 해고당한 노조활동가였다는 사실이 새삼 알려지게 됐다. <늙은 노동자의 노래>는 1986년 펴낸 뒤 ‘판금’ 조치를 당한 아픔을 겪었다.

소설집에서 잡급직인 ‘늙은 노동자’ 서씨는 지금으로 치면 비정규직이다. 회사를 12년 다녔어도 일당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3천400원, 퇴직금도 연차휴가도 없다. 노조에는 가입했지만 아무런 발언권도 없고 보호도 받지 못한다. 노조를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사무국장은 사장에게 이야기하란다. 용기를 내 사장을 찾아갔더니 사장이 금일봉을 쥐어 준다. 그 사진이 사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부랴부랴 노조는 서씨에게 모범조합원상을 주겠다고 한다. 서씨가 상을 받는 그 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들이 반기를 들고 어용노조의 불의를 낱낱이 고발한다.

소설집에 다른 작품들의 배경도 오늘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편 ‘타오르는 현장’은 엄혹한 군사정부 하에서 어렵게 일군 민주노조를 지키는 여성노동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악법 중 악법 ‘제3자 개입금지법’을 무기로 군사정권과 회사는 노조 위원장 ‘연주’를 압박한다. 여성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고 가족을 찾아가 위협하며 남자 사원으로 구성된 구사대도 동원한다. 점차 조여오는 포위망 속에서도 연주는 끝까지 무릎 꿇지 않는다.

“이름 없는 노동투사들에게 바치는 반성문”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은 거의 실재라고 작가는 소개한다. 70년대 봉제사업장의 폐결핵 문제를 다룬 단편 ‘그림자 사람들’에서는 어용노조의 외면 속에서 폐결핵 진단을 받은 여성노동자들이 하나둘 회사에서 쫓겨난다. 아픈 동료를 돕겠다며 기금모금을 위한 일일찻집 티켓을 팔겠다고 하니, 회사와 어용노조가 합심해 막는다. 정보과 형사까지 찾아와 티켓을 팔지 말라고 협박한다. 거부하는 ‘나’에게 형사는 배후조종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결국 회유와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은 ‘나’는 공장 밖에서 연행된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언론 문제도 단편 ‘탕녀와 폭도’를 통해 고발했다. 이 작품은 1987년 쓴 작품으로 이번 개정판에서 새롭게 추가된 작품이다. 기자 ‘윤태한’은 자신이 쓴 기사가 구사대가 만든 유인물에 쓰인 것을 봤다. “언론도 그대들을 탓하고 있다. 무리한 요구조건을 철회하고 조업에 임하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그 기사에는 “근로자들의 과다한 요구에 기업 휘청” 제목하에 “요구사항이 무려 30개나 돼”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파업투쟁을 하다 얻어맞아 피 흘리는 여성노동자 ‘선이’가 묻는다. “30개 요구사항이 뭔지나 알고 썼느냐”고. 권력과 자본, 언론의 노골적인 야합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작품이다.

이 밖에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과 농성, 그 주변 이야기를 담은 ‘기름쟁이 노랫소리’, 심각한 산업재해 문제를 다룬 ‘생사의 지붕 밑’도 수록했다.

작가가 작품에서 주로 그린 70~80년대 노동현장은 2022년을 사는 오늘의 노동자의 처지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 20년을 일해도 최저시급을 받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사회적 합의 이행과 노조파괴 중단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이어 가는 파리바게뜨 노동자. 지나치게 높은 싱크로율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럼에도 엄혹했던 70~80년대 노동자 투쟁을 거쳐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전진한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작가는 “노동운동에 대한 갖가지 폭압과 회유에 맞서 당당히 싸운 그 시절 이름 없는 노동투사들에게 반성문을 쓴다는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겨우 수정작업을 마쳤다”고 고백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