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바게뜨 사회적합의 이행 검증위원회 주최로 지난 6월16일 전태일기념관에서 제1차 결과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정부와 국회의 무관심 속에 불이행·파기가 잇따르면서 사회적 합의의 구속력을 강화하는 방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불합리한 노동실태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뒤 사용자쪽의 일방적인 불이행과 파기가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잇따라 위기에 처했다. 파리바게뜨 제조(제빵·카페)기사 차별이 대표적이다. 고용노동부가 2017년 SPC그룹 계열사인 ㈜파리크라상이 제조기사를 불법파견했다며 과태료 530억원을 부과한 후 사회적 대화를 통해 사업주와 파리바게뜨 가맹점주협의회·민주노총·한국노총, 시민사회대책위원회·정의당·더불어민주당이 참여한 사회적 합의가 2018년 1월11일 체결됐다. 그러나 최근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의 사회적 합의 이행검증위원회가 세 차례에 걸쳐 이행점검을 한 결과 12개 조항 가운데 실제 이행 완료는 2개 항에 그쳤고, 핵심인 급여와 처우 조항은 불이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밖에 모성보호제도 위반과 새로운 부당노동행위 혐의까지 드러났다.

SPC그룹, 불매운동·유예한 행정처분 속개로 이행 강제

현재 대응은 두 가지 갈래다. 우선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SPC 불매운동이다. 소비자운동의 일환이지만 사회적 합의 불이행에 대한 사회적 저항감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함의가 있다. 권영국 변호사(해우법률사무소)는 “독일 등지의 사회적 합의도 법적 기반이 뚜렷히 없지만 스스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규범으로 작동해 불이행이나 파기가 어렵다”며 “사회적 저항의 형성으로 사회적 합의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사회적 풍토가 정착돼 있다”고 설명했다. SPC그룹에 대한 불매운동이 이런 사회규범을 정착시키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방법은 법률 대응이다. 파리바게뜨 제조기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노동부가 과태료 530억원을 부과한 처분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체결됐다. 당시 행정처분을 유예했다면 사회적 합의가 불이행한 상황에서 유예한 처분을 다시 내리는 방식의 접근이 가능하다. 다만 당시 과태료처분이 조건부 유예됐는지, 아예 철회됐는지는 점검해 봐야 할 대목이다. 게다가 노동부가 그럴 의지가 있느냐도 별론이다. 12일 이행점검 국회 토론회를 연 강은미 정의당 의원실 관계자는 “현재 노동부는 파리바게뜨 제조기사 관련 문제를 노노갈등으로 치부하고 있다”며 “노동부가 적극적으로 유예한 행정처분에 다시 효력을 발생시킬 의지가 있을지 점검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죽음의 행렬’ 멈춘 사회적 합의, 대처 방안 불투명

그나마 파리바게뜨는 방향성이 명확한 쪽에 속한다. 또 다른 굵직한 사회적 합의였던 마필관리사 그리고 택배기사 관련 합의는 가닥을 잡기가 쉽지 않다. 두 사회적 합의 모두 잇따르는 죽음을 막기 위한 합의였지만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거나 아예 파기된 상태다.

파기된 사회적 합의는 말 관리사(마필관리사) 고용구조 개선협약이다. 2017년 12월27일 농림축산식품부와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한국마사회, 그리고 노동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마필관리사의 이중 고용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타결했다.

그러나 이미 휴지 조각이 됐다. 공공운수노조 제주경마공원지부가 제주조교사협회를 상대로 임금체불 소송을 제기한 뒤 마필관리사를 집단·직접고용할 의무를 부과받았던 제주조교사협회가 일방적으로 해산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합의주체인 농림축산식품부는 “대화를 중재하고 있다”고만 밝힐 뿐 사회적 합의 주체로서의 책임지는 자세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사태 초기에는 조교사협회 해산시 농림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합의가 있었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러나 사단법인격인 조교사협회는 해산 요건만 충족하면 자율적으로 해산을 결의할 수 있다는 게 농림부의 해석이다.

사회적 합의 조항 역시 구체적인 동일처우를 명시했던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사회적 합의와 달리 집단고용에 무게를 두고 있어 정부가 “개별 노사관계”라고 주장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행정처분 같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파리바게뜨 제조기사 사회적 합의와 달리 사회적 합의 파기시 책임을 물을 만한 단서가 뚜렷하지 않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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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주체 ‘대리점연합회’와 개별 대리점주 효력이 관건

비교적 최근에 이뤄졌던 택배 노사의 사회적 합의도 유사하다. 택배 노사는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많은 택배기사가 과로사하자 대책 마련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후 과로사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맺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파업에 참여했던 택배기사에게 개별 대리점이 해고를 통지하면서 문제가 다시 점화했다. 이후 택배노조와 대리점연합회는 해고통지 철회와 표준계약서 작성 같은 내용을 뼈대로 하는 2차 사회적 합의를 다시 맺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부 대리점은 해고통지를 철회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는 대리점연합회의 법적 위상이 문제가 된다. 대리점연합회에 속한 대리점에 사회적 합의를 강제할 수 있는 지배력을 갖춘 집단이 아니라면 개별 대리점주의 사회적 합의 준수는 권고 이상의 효력을 갖기 어렵다. 한선범 택배노조 정책국장은 “과로사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는 대체인력 투입 등에 문제가 아예 없지는 않더라도 지켜지는 상황이지만 2차 합의는 여전히 갈등”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노총과 종교·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월25일 서울 중구 CJ더센터 앞에서 사회적합의 이행 거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민주노총과 종교·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월25일 서울 중구 CJ더센터 앞에서 사회적합의 이행 거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민법에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보편적 강제성 구축 필요성 대두

이처럼 사회적 합의의 수준과 합의주체인 사용자쪽의 지위가 다 다르다 보니 이를 일원화한 사회적 합의 관련 근거법령이나 조항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효력이 있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권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합의는 민사상 계약관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형사상 벌칙을 주는 방식의 제도를 만드는 것은 법 체계상 어렵다”며 “게다가 사회적 합의 이행을 강제하는 법규정을 만들면 추가적인 사회적 합의 도출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합의 이행 책임성을 강화하면 사용자쪽이 아예 사회적 합의에 나서지 않을 우려가 있다는 얘기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처럼 사회적 합의에 대한 규범력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국회쪽도 우선 이런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상황이다.

그러면서 제도적으로는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이 손에 꼽힌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원고의 불법행위가 고의적이고 악의적일 때 법원이 피고를 징벌해 실제 손해보다 더 많은 금액을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다. 우리나라 법조계도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을 수년간 검토하고 있지만 현재는 개별법에 제각각 도입되는 수준이다.

권 변호사는 “사회적 합의는 민사상 계약에 해당하는 성격으로, 단순히 ‘노력을 하겠다’는 수준의 신사협약과는 구분된다”며 “개별법에서 배타적으로 도입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기본법인 민법에 도입해 민사상 계약에서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면 사회적 합의 불이행이나 파기에 대해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제기해 사용자에게 이행을 강제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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