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가 1991년 12월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한 이후 지금까지 비준한 협약은 모두 32개다. 그중 지금도 효력을 발휘하는 협약은 32개가 아니라 30개다. 우리 정부가 2003년 4월 비준한 53호 ‘선원자격 증명서’ 협약과 1992년 12월 비준한 73호 ‘의료검진(선원)’ 협약은 지난해 열린 ILO 109차 국제노동대회(International Labour Conference)에서 폐지됐다. 선원의 근무조건과 관련된 두 협약이 2006년 ILO가 채택하고 2014년 우리 정부가 비준한 해상노동협약(Maritime Labour Convention)에 통합됐기 때문이다.

1992년 12월 대한민국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ILO 협약 3개를 비준한다. 73호 ‘의료검진(선원)’ 협약과 81호 ‘근로감독’ 협약, 그리고 122호 ‘고용정책’ 협약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73호 협약은 ILO에 의해 이미 폐기됐다.

ILO 협약 비준과 국내 입법의 관계 문제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주류 노동법학자들의 입장은 ‘선 입법-후 비준’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하에서 기본협약 3개(29·87·98호) 비준 문제가 등장할 때까지 그 이전에 비준된 29개 협약들 가운데 국회 동의를 전제하는 ‘선 입법’ 과정을 거쳐 ‘후 비준’이 이뤄진 협약은 거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준된 협약과 국내 법령이 서로 일치하는지 여부는 여전히 의문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문제점에 대한 정부의 조사나 학계의 연구, 그리고 노동조합의 문제 제기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필자는 문재인 정권하에서 기본협약 비준을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선 입법-후 비준’ 주장은 기본협약 비준을 저지하고 지연시키기 위한 ‘반노동’ 이데올로그들의 사기극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4월 비준된 기본협약 3개와 국내 법령 사이의 충돌은 그 협약들이 법률적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주지하듯이 29·87·98호 협약은 ‘선 입법-후 비준’ 논리에 입각해 노동법학자들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통해 법안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국회가 관련 입법을 완료한 다음에 비준한 ILO 협약들이다. ‘선 입법’을 통한 국회 동의 과정을 거쳤으니 국내법과 협약은 서로 충돌하지 않아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필자는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최초의 협약들 가운데 하나인 81호 ‘근로감독’ 협약도 비준된 협약 내용과 국내 법령이 충돌하면서 서로가 따로 노는 대표적인 사례라 생각한다. 물론 81호 협약은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협약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입법적 재정리와 국회 동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비준했다.

81호 ‘근로감독’ 협약은 ILO가 채택한 190개 협약을 3가지 범주로 나눈 기본협약·우선협약·기술협약 중 정부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노동행정체제를 규율하는 우선협약(Priority Conventions)에 속한다. 81호 협약 12조1항은 “적절한 증명서를 소지하고 있는 근로감독관”의 첫 번째 권한으로 “감독대상인 사업장에 주야 어느 시간이든 예고 없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규정한다. 이른바 불시점검 권한이다.

‘선 입법-후 비준’ 논리든 ‘선 비준-후 입법’ 논리든 협약 조항의 입법적 충족을 중요시 해 온 대한민국 노사정 3자의 관행에 따르자면 근로감독관의 불시점검권은 법령에 들어가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또한 81호 협약 5조는 “(가) 근로감독기관과 이와 유사한 활동에 관여하는 그 밖의 정부 기관 및 공적·사적기관 간의 효과적 협조(cooperation), (나) 근로감독기관의 감독관과 사용자 및 근로자 간의 협력 또는 이들 단체 간의 협업(collaboration)”을 규정하지만, 우리나라 법령 어디를 봐도 이에 상응하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제안한 ‘경기도 노동경찰’도 근로감독 제도에서 ‘운용의 미’를 살리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근로감독을 고용노동부가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다. 근로감독 행정에서 지방정부와의 “협조”는 물론 노동조합과의 “협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81호 협약 20조는 “중앙감독기관은 통제를 받는 감독기관의 업무에 관한 연차종합보고서(annual general report)를 발간한다”고 규정하지만, 근로감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차종합보고서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노동부가 매년 발행하는 ‘고용노동백서’에 부실한 내용과 형식적인 통계를 통해 근로감독의 실태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단히 성의 없이 소개될 뿐이다.

협약과 법령 간의 충돌 및 불일치만 문제가 아니다. 국내법적 효력을 갖는 국제조약인 협약의 번역도 문제다. 법제처의 국가법령정보 사이트를 보면 앞서 살펴본 81호 협약 5조의 “효과적 협조(effective cooperation)”는 “효과적 효력”으로 부실하게 번역돼 있다. 아마도 번역 후 국가법령정보 사이트에 올리면서 꼼꼼한 교정을 보지 않은 듯하다.

협약의 내용과 법령의 조항이 충돌하고 협약 조문 번역이 부실한 문제는 81호 ‘근로감독’ 협약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지난 11일 폐회한 ILO 110차 국제노동대회에서 ‘기본협약’으로 범주가 변경되면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직업안전보건 협약들도 동일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 없듯이, 비준한 협약들의 토대가 부실한 상황을 개선하지 않고서 비준한 협약들의 효과적 이행(effective implementation)을 기대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노동문제(Labour Questions)를 개선한다는 미명하에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노사정 3자 모두에게 유행하고 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이미 있는 것부터 점검하고 살피는 노력이 우리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윤효원 객원기자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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