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노동뉴스>는 1992년 7월18일 창립했다. 올해로 30년을 맞았다. 서른 살 매일노동뉴스는 순탄하지 않았다. 때로는 실패했지만 또 때로는 성공했다. 1990년 2월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출범이 계기가 됐다. 전노협은 숨어 운동하던 단체와 활동가들의 활동 양상에도 큰 변화를 줬다. 사회변혁을 꿈꾸는 단체들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 계기가 됐다. 노동계 동향을 전국적으로 공유하고 활동가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미 86년 출범한 노동교육협회나 89년 창간한 주간 노동자신문이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90년께에는 노조의 단체교섭 협상력을 높이겠다는 목표로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매일노동뉴스 전신인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를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활동가들이 만들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흐름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메일로 노동소식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일간지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메일·PC통신·팩스’로 노동소식 전파

1호는 1992년 7월18일 PC통신 하이텔에 처음 배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진정추 노동국장으로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김태균 노사발전재단 사업연구지원단 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해 상반기부터 기존 뉴스매체를 갈무리하고 노조 성명·자료를 수집해 정리한 뒤 활동가와 노조에 이메일로 뿌렸다. 하이텔 전신인 코텔(KOTEL)로도 비정기적으로 자료를 등록했다. 당시 이름은 ‘매일’이 없는 ‘노동뉴스’였다. 당시 노동부(현 고용노동부)가 생산하던 소식지 이름도 ‘노동뉴스’였다고 한다. 일간지 발행까지 염두에 두고 ‘매일’을 붙여 차별화했다. 하이텔에 이어 천리안·나우누리에도 신문을 등록했는데 당시 ID는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의 영문명 ‘klpic’였다. 신문은 한글 프로그램으로 편집해 팩스로 전송하기도 했다.

노회찬 당시 진정추 조직위원장이 신문 발행 아이디어에 크게 공감하면서 조직 사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팩스 2대 비용을 지원받았다. 팩스 전화번호 뒷자리는 ‘0710’ ‘0711’이었다.

정식으로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를 만든 날인 1993년 5월18일을 매일노동뉴스 창간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다음날 5월19일부터 매일노동뉴스 192호를 종이에 인쇄해 전국에 배포했다. 그 이전까지 PC통신으로 배포한 신문은 150여건 정도였는데도 192호라고 정한 데에는 숨은 이유가 있다. 진정추 활동으로 신문발행을 두 달 정도 중단했던 날까지 포함해 192호로 계산했다. 신문은 수도권 여섯 곳 지사를 운영하며 배달했는데, 사실 진정추 지부였다. 지역은 고속버스에 신문을 실어 보냈다. 지역 활동가가 신문을 받아 배포했다.

192호 이전 신문은 창립 30년을 맞아 진행한 ‘매일노동뉴스 1호 찾기’ 캠페인을 통해 발견했다. 1993년 1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갈무리한 신문명과 제목, 자체 생산한 기사와 기사명이 담긴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김태균 부장이 소장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1992년도 신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파일 복원으로 새로운 역사를 찾았다. 갈무리한 뉴스를 분석하거나 노조 성명 등을 주로 신문에 담던 매일노동뉴스가 자체 기사를 본격 생산하기 시작한 때는 1994년께다. 1993년 3월12일자 신문에 처음으로 자체 생산 기사가 실렸는데 당시 제목은 “동양나이론 19일 파업”이다. 노조가 해를 넘겨 열린 단체협상에서조차 진전이 없어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준비하고 있고, 회사는 과거에도 야유회를 열어 찬반투표를 사실상 무산시킨 적이 있다는 소식이다. 현재 회사명은 효성티앤씨다.

주간지도 발행, 노동전문 데이터베이스 구축

1995~1996년은 매일노동뉴스 입지를 공고히 하며 활동 폭을 크게 확장하던 시기다. 1995년 5월8일 ‘주간 노동정보은행’을 정기간행물로 등록하고 같은달 22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일간지에 더해 주간지를 냈던 까닭은 일간지 정기간행물 등록요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매일노동뉴스를 주간 노동정보은행 자매지 형태로 제작했다. 당시 기자들은 주간지와 일간지를 동시에 만들었다. 노동전문 데이터베이스인 ‘노동정보은행’과 ‘노동정보검색서비스’도 PC통신을 통해 운영했다. 자동응답전화(ARS) 음성녹음 방식으로 현장의 소리를 전달하는 ‘노동뉴스 700-2468’ 서비스를 제공하고, 영문판 ‘Weekly Korea Labor News’를 제작해 한국 노동뉴스를 전 세계에 알렸다.

1996년 4월30일 1천호 발간을 맞아 개최한 기념식은 노동계에서 지금도 회자된다.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 조남홍 경총 부회장, 장을병 민주당 공동대표, 김근태 국민회의 부총재 등이 기념식에 함께했다. 법외단체로 출범했던 민주노총을 포함해 노사정 대표자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같은해 11월25일 PC통신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에 M-NEWS(매일노동뉴스)를 개통한 것을 자축하는 기념식을 개최했다. 다른 신문기사 갈무리를 제외하고 자체생산 기사로만 채운 것은 1999년 6월22일부터다. 같은해 10월26일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는 해소하고 ㈜매일노동뉴스 법인을 설립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도전은 이어졌다. 2천호를 발간한 2000년 5월24일 인터넷 매일노동뉴스(labornews.co.kr)와 인터넷 노동방송국(ltn.co.kr)을 선보였다. 창립부터 발행인·대표를 맡았던 노회찬 전 대표는 2003년 9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같은해 10월9일 박승흡 대표가 발행인을 맡으면서 매일노동뉴스 2기가 출범했다. 이듬해 9월15일 3천호 발행 기념식 인터넷뉴스 레이버투데이(labortoday.co.kr)를 창간했다. 주간 노동정보은행은 2005년 4월14일 자연스레 폐간했다. 매일노동뉴스가 일간신문 정기간행물로 정식 등록한 것은 2005년 10월20일이다. 같은달 26일 인터넷신문으로도 등록했다.

2012년 11월2일 창립 20주년과 5천호 발행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100년 가는 노동언론의 미래 비전을 선포했다. 노동포털을 구축하고, 증자사업을 통해 노사정 네트워크를 강화한다는 방안도 내놓았다. 이를 계기로 2014년 10월30일 영남본부를 설립하면서 영남지역 조간 배달망을 구축했다.

창립 30년을 맞은 매일노동뉴스는 올해 3월 이사회에서 ‘또 다른 30년을 위한 준비’를 내용으로 한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뉴스공급자로서 역량을 높이고 노동생태계를 확장하는 플랫폼을 강화하자는 전략을 채택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