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새로운 권력의 등장으로 여러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게 좋다’지만, 권력의 성격이 변했다고 해서 기존의 ‘사회적 합의’가 무시돼서는 안 된다. 그런데 벌써부터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어 우려된다. 특히 일터의 안전·보건 문제에 있어서는 명백한 후퇴가 예고되고 있다. 그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한국경총이다.

경총은 지난 16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개정에 대한 경영계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10만명의 국민동의 청원을 통해 국회에서 제정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모호함’ ‘자의적’ ‘불충분’ ‘불합리’라는 온갖 수식어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41페이지 분량의 경총 의견서가 담고 있는 문제를 조문별로 짚기에는 지면에 한계가 있어 생략하고, 몇 가지 핵심적 문제만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경총은 “1월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뚜렷한 산재감소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법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으므로, 쓸모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법의 효과는 중대재해 발생에 따른 사업주·경영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뤄진 이후 비로소 그 효과가 드러날 수 있다. 경총 스스로도 우려하고 있듯이, 법이 마구잡이식으로 적용돼서는 안 되므로, 수사-기소를 거쳐 최종적으로 형이 확정될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안전보건관리가 부실해 종사자의 사망 등 중대재해라는 결과를 초래했을 때 처벌을 통해 철저한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로 제정된 법은, 실질적인 처벌의 결과가 사회적으로 확인된 이후 본격적으로 효과가 번질 것이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신체와 생명의 훼손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당하도록 방치했을 때, 우리 사회가 기존과 달리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이다. 용납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뿌리내리기까지는 조금 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를 선택했다.

두 번째, 경총은 경영책임자의 의무 내용 및 책임 범위 등이 불명확해 이 법을 준수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은근슬쩍 그 근거로 경총이 실시한 자체적인 설문조사 결과를 들이밀며, 81%의 응답기업이 ‘개정의 필요성’을 꼽았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사람을 유해·위험에서 보호하고 예방해야 할 구체적인 책임과 의무는 이미 1981년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부터 구체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총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국면마다 구체적 조문이 1천200여개에 달하며 지시적·규제적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주장해 왔다.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처벌을 면하기 쉽지 않지만, 사업장의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며 ‘자율’의 확대를 요구해 왔다. 따라서 지금 중대재해처벌법은 개별기업의 구체적인 현실이 다르므로 중대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사업장별로 예방에 필요한 인력 배치 및 예산 편성을 통해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과 이행 △재해 발생에 따른 재발방지 대책 수립과 이행조치 △안전·보건 관계법령에 따른 의무이행에 필요한 관리상 조치 등에 만전을 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경총은 그동안은 “세부적이고, 세세한 규정은 지키기 어렵다”고 줄곧 목소리를 내놓고서, 이제 와서는 포괄적으로 책임을 부여해 예방에 신경쓰라고 하니 “모호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상 “안전·보건관리에 무책임할 권한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는 경총이 “이 법의 개정이 시급한데, 시일이 소요되므로 우선 시행령을 개정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특히 윤석열 정부를 향해 법에서 위임하지도 않은 권한 행사를 적극 요구했다. 게다가 핵심내용이 ‘경영책임자의 정의’를 수정해 달라는 요구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경총은 그동안 최고경영책임자를 대신해 처벌받을 사람을 세우는 것아니냐는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개정안으로 구체화했다. 경총은 ‘경영책임자에 준하는 사람’에 대해 △법인의 정관, 이사회 의견 등을 통해 사업 또는 사업장의 안전보건에 관한 조직·인력·예산 등을 관리하도록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은 사람 △이에 따라 위임을 받은 자가 선임돼 있는 경우에는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은 이 법에 따른 안전 및 보건확보 의무이행의 책임을 면한다고 적시하며, 이를 대통령의 직권으로 행사하라고 요구했다. 국민 다수의 공감대에 기초해 발의됐으나, 국회에서 수없이 많은 진통 끝에 가까스로 통과된 중대재해처벌법을 가장 손쉽게 폐기처분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경영책임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얘기다.

이 외에도 경총의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안은 그동안의 ‘사회적 합의’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내용을 조항별로 담고 있다. 실로 시대를 역행하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그동안 어렵사리 마련한 상식과 룰이 파괴되고, 공들여 쌓아 올린 ‘사회적 합의’가 무너지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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