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오랜만에 서울에서 일정을 마치고 도심을 벗어나던 차에 지방소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현수막을 목격했다. ‘경축! 1차 정밀안전진단 통과-○○재건축추진위원회’. 건물이 안전하지 못해서 재건축이 필요하다는데 안전진단을 ‘통과’했다며 경축한다니, 쓴웃음을 지으며 차를 달려 예정된 교육장소에 도착했다. 작업환경측정을 주제로 진행되는 교육에 찾아온 노동자들을 미리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 현장의 작업환경측정결과가 당최 기준치를 넘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한쪽에는 자기 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고도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고, 한쪽에는 자기 현장의 작업환경이 안전하다는 진단을 받고도 불같이 화를 내는 노동자들이 있다.

작업환경측정제도의 문제점을 탐구한 한 연구(작업환경측정 보고제도 개선방안 연구, 임대성 외, 2021)에서 측정기관·감독기관·사업장 관계자 등 16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작업환경측정 결과가 작업장의 실제 유해인자 노출수준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38.3%에 불과했다. 조사 대상이 작업환경측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지금의 작업환경측정 신뢰도가 얼마나 낮은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불신은 이미 여러 건의 중독사고로 인해 막연한 의구심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됐다. 2018년 시안화나트륨에 중독돼 숨진 스물세 살 청년이 일하던 사업장은 작업환경측정에서 수년간 단 한 번도 노출기준치를 초과하지 않았다. 최근 트리클로로메탄 집단중독이 발생한 두성산업 역시 사고 이후 국소배기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작업환경측정 결과는 언제나 정상이었다.

작업장의 유해물질 노출수준을 측정하고 필요한 개선조치를 해 직업성질환을 예방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작업환경측정제도는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 작업환경측정의 신뢰도와 효용성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대표적으로 2005년 노말헥산 중독으로 8명의 여성 이주노동자들에게 말초신경병증(이른바 ‘앉은뱅이병’)이 발병한 사건을 계기로 ‘작업환경측정제도 개선을 위한 혁신위원회’가 가동됐다. 위원회는 작업환경측정이 단순히 측정에만 머물러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산업안전보건법 취지에 따라 ‘쾌적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한 포괄적인 ‘작업환경평가’로의 전환을 핵심과제로 하고 노출수준에 따른 모니터링과 작업환경개선 방향의 다변화, 위험성평가와의 연계, 노출기준과 산업보건인프라 정비, 노동자의 참여권과 알 권리의 보장 등의 구체적인 과제들을 도출했다. 그러나 혁신위원회 제안들은 허용기준 제도의 도입(2008년) 등 일부만 반영된 채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20년 정부는 다시금 3개년 과제로 포괄적 작업환경측정제도 개선방안 연구를 시작했다. 과연 이번에는 15년 전과는 다른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사실 개선방안 연구의 핵심적인 목표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한 측정을 넘어서는 포괄적인 작업환경평가제도로의 전환, 이 목표를 위해 검토되는 아이디어들 모두가 경청할 가치가 있다. 일괄적이고 주기적인 측정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 특정 유해인자를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서 측정할 수 있도록 측정 시기와 방법을 다양하게 규정하는 방안, 필요한 경우에는 근로감독과정에서 감독관에 의한 측정이 이뤄지도록 하는 방안, 위험성평가 과정에 측정이 포함되도록 해 사업장 자율관리와 노동자 참여를 강화하는 방안 등이 그것이다.

이번에야말로 큰 틀의 제도개선이 이뤄지기를 바라며 몇 가지만 첨언하고자 한다. 먼저 작업환경측정제도 개선방안이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비롯한 안전보건정책의 구조적인 변화와 맞물려 고민돼야 할 것이다. 새롭게 정의되는 행정의 역할, 사업주의 의무, 노동자의 권리에 조응하는 개선안이어야만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고 15년 전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지금의 작업환경측정이 결국 사업주가 구매하는 서비스이며 그 서비스는 이미 작지 않은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측정 신뢰도 문제의 밑바닥에는 결국 측정서비스로 만족시키려는 대상이 노동자가 아닌 사업주라는 불편한 진실이 자리하고 있다. 자본의 논리는 재개발에 환호하는 부동산 시장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부동산 문제만큼이나 해결하기 어려운 암담한 이야기로 들렸다면 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다. 이날 교육을 마친 노동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늦게까지 삼삼오오 모여서 당장 다음주부터 시작될 예비조사에서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측정하자고 요구할지 토론을 이어 갔다. 쇳물을 들고 다니는 노동자는 열사병지수(WBGT) 측정을 어디서 할지 고민했고, 동료가 혈액암에 걸린 노동자는 발암물질 목록을 곱씹었다. 매번 원청 주도로 진행되는 작업환경측정에 처음으로 참여할 권리를 쟁취한 하청노동자들이 그동안의 울분은 뒤로하고 한 걸음 나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작업환경측정제도 개선은 결국 이들의 손에 어떤 무기를 쥐어줄 것인가의 문제다. 언제나 그렇듯 답은 현장에 있고 희망은 노동자들의 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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