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사람들은 미래는 막연하게 생각하고 현재를 확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는 구체적이라 생각하고, 미래는 추상적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미래가 구체적이고 현재는 추상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미래 목표를 세워 놓았지만,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더 많지 않은가.

현재를 구체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사건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확실한 건 바로 자기의 생각과 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을 중심으로 사건을 배열하고 확실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기 때문이다. 그게 밥을 먹는 일이든 자판기를 두드리는 일이든 간에.

그러나 나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현재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사건에서 벗어나서 현실을 바라보면, 현실은 수없이 많은 사건의 우연한 결합일 뿐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행위자가 있고, 시공간을 달리한 사건들이 존재한다. 인간은 이 사건들을 전지적으로 해석하고 다음 순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어쩌면 종교적으로 깨우친 사람들이 지금 당장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추상적 사고능력이 뛰어난 이들은 그 복잡성 가운데에서도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법칙도 많은 단서와 전제 조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법칙은 현상을 해석하기 위한 수많은 가닥 중 한 가닥일 뿐이고, 오직 그 가닥을 중심으로 사건을 배열하고 해석함으로써 과학성을 담보받을 뿐이다.

한편 사람들은 다가올 사건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할 수 없으면서도 지나간 사건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면, 지금의 결과가 어제의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해석할 수 있는 몇 개의 사건 또는 가닥을 끄집어내어 현재라는 결과의 원인으로 단정을 짓는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평가와 진단이 있을 시기다. 하지만 곧바로 지방선거가 이어진 탓인지 대선 평가토론회와 같은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토론은 많지 않다. 대체로 6월 이후에 본격적이고 차분한 진단이 있을 것 같다. 지방선거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번 대선은 평가가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평가의 가닥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선거라는 식의 표현을 쓸 수 없는 선거이기도 하다. 이는 진보진영에도 마찬가지다. 몇 가지 지점을 끄집어내어 이를 원인으로 삼고 이번 대선은 그에 따른 결과라는 방식의 평가는 필요하기는 하지만 많은 시사점을 주지는 못할 것 같다. 현재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평가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그라운드 제로, 또는 원점으로 생각하고 이후를 전망하는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흔히 평가가 올바로 이뤄져야 앞으로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반만 이야기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구체적인 미래에 대해서도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다. 그러니 현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받으면 답도 하지 못한다. 게다가 완전히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수도 있다. 바둑을 예로 들자면 과거의 기보를 참고해 승패의 원인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기보에도 없는 새로운 수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여러 곳에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있고 구체적인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다. 노회찬재단에서도 6~7월 즈음에 대선 이후 전망과 과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이론과 정책 연구자, 현장 활동가와 이론가들에게 사회운동의 새로운 판짜기를 제안할 계획이다. 마침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움직이고 있고, 노동운동 활동가들에게서도 제안이 나오고 있다. 이런 제안과 활동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내는 작업이 시작돼야 한다.

윤석열 정권 5년을 어떻게든 견뎌 보자는 식의 자세는 곤란하다. 그건 새로운 반복을, 또는 원상회복을 꿈꾸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복처럼 보일 뿐, 사건과 역사에 진짜 반복은 없다. 게다가 진보진영에는 무언가 되돌아가야 할 원형도 없다. 초토화된 도시에는 그간 시도하지 못했던 과감한 도로계획을 세우듯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로운 설계도를 그려야 한다. 매 순간 원점이라 생각하고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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