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김진숙(62·사진)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지난 10일 새벽 20대 대통령 당선자 윤곽을 확인하고 투쟁 중인 노동자들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김 지도위원은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오랜 벗 황이라 금속노조 부양지부 미조직부장과 마시지도 못하는 술로 속을 달래며 절망의 시대를 맞이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저는 그 기분을 아니까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지금 절망하고 있을까 생각이 들죠.”

금속노조와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합의로 지난달 25일 김 지도위원은 복직했다. 2년 전 이미 정년을 넘긴 만큼 25일 명예복직을 하고 그날 바로 퇴직했다. 1986년 해고 이후 36년 만에 공장으로 돌아간 것은 단순히 김진숙 지도위원 개인의 명예회복을 넘어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 의미가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20대 대선 바로 다음날인 지난 10일 오후 부산 동래구 온천장역 근처 카페에서 김 지도위원을 만났다. 정년을 앞둔 2020년 말과 2021년 초 부산-청와대 ‘희망뚜벅이’ 당시 두 번의 인터뷰 때보다 여유가 느껴졌고,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복직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기도 전에, 가벼워진 마음의 무게는 다시금 무거워졌다. 김 지도위원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에게 “검사의 눈이 아닌 대통령의 시각으로 노동자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침에 눈 뜨면 마음 가벼워”
“후배들 힘으로 복직돼, 가장 행복한 복직”

- 늦었지만 복직 축하드립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복직 이후) 제일 달라진 건 아침에 눈을 뜨면 마음이 되게 가벼워요. 전에는 아파서도 깨고 스트레스 받아서도 깨고 그랬거든요. 출근투쟁을 할 때는 오전 4시30분에는 일어나야 6시30분까지 공장 앞에 갈 수 있으니까 하루를 길게 시작했는데 이제 그런 부담은 줄어들었죠. 그런데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고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 36년 만에 복직이 이뤄진 배경이 있나요.
“대구 영남대의료원 복직투쟁을 했던 박문진(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이 ‘선배는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행복한 복직과 퇴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후배들의 힘으로 복직이 된 거니까요.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심진호 집행부가 지난해 말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재선을 하면서 사측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어요. 심진호 집행부는 지난 2년간 출근투쟁, 릴레이단식, 천막농성 등 사실상 복직에만 ‘올인’을 했어요. 임금이나 성과급 문제도 아니고 해고자 복직만 가지고 싸우면 피곤할 텐데 우리 조합원들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80% 가까운 지지율을 받은 그 힘이 결정적이었어요. 재선 이후부터 실무적으로 한 달에 두 번씩 만나고 논의가 진전이 됐죠.”

심진호 지회장 재선으로 급물살을 탄 김 지도위원 복직 문제는 지난달 23일 금속노조와 HJ중공업이 ‘해고자 김진숙 명예복직 및 퇴직 합의서’에 서명하며 마무리됐다. 노사는 김 지도위원이 2월25일자로 복직한 뒤 같은날 퇴직하고 퇴직과 관련된 모든 사항은 노사협의로 정하기로 했다. 김 지도위원은 지난달 25일 영도조선소에서 열린 복직 및 퇴임식에서 “탄압과 분열의 상징이었던 한진중공업 작업복은 제가 입고 가겠다”며 “더 이상 울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는, 더 이상 갈라서지 않는 이 단결의 광장이 조합원들의 함성으로 다시 꽉 차는 미래로 거침없이 당당하게 가십시오”라고 외쳤다.

- 지난달 25일 퇴임사는 묵직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글을 준비할 때 마음은 어떠셨나요.
“저는 글을 쓸 때 딱 마음먹고 앉아서 쓰는 게 아니라, 산책하면서 짬짬이 생각나는 것들을 휴대전화에 한 줄씩, 두 줄씩 써 놓고 나중에 그걸 정리하거든요. 그런데 글을 쓰면서도 많이 울었어요. 한 줄 쓰고 울고 두 줄 쓰고 울고.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36년 전 출근투쟁한다고 두들겨 맞고 감금되고 닭장차에 실려 유치장 끌려가고 했던 기억도 나고, 마음이 뭐라고 참 말할 수 없이 북받쳐 왔어요.”

“노동자에게 민주노조가 목숨이라는 말, 수사 아닌 현실”

- 복직하면 가장 먼저 박창수·김주익·곽재규·최강서, 동료들이 일했던 곳을 가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보셨을 땐 어떠셨나요.
“야드와 도크가 텅텅 비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상선이 중심인 사업장인데 특수선만 하니까 사람이 없을 수밖에요. 제가 일했던 선대조립과나 박창수가 일했던 배관공장도 많이 낡았더라고요. 그런데 과거에 비해서는 현장이 눈에 띄게 정돈된 느낌이었어요. 예전엔 사람도 많았지만 안전에 대한 개념이라는 게 전혀 없었거든요. 절단기 선들이 막 정신없이 엉켜서 거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사다리를 고정해 놓고 작업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냥 대놓고 했어요. ‘노동자에게는 민주노조가 목숨’이라는 말은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에요. 조선소는 특히 설명하지 못하는 사고들이 굉장히 많은데 한진중공업은 노조 민주화 이후 산재사고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 노조 대의원에 출마한 뒤 ‘도시락 투쟁’으로 쟁취한 구내식당도 가보셨나요.
“못 가 봤어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밥 때를 지나쳤어요. 그리고 그날 손님들이 온다고 갈비탕에 삼겹살에 반찬이 다 고기였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고기를 안 먹거든요. 시간도 지나 버렸고, 먹을 것도 없겠다 해서 식당에는 가지 못했는데 아쉬움이 남아요.”

- 현장도 전과는 달라졌고, 김 지도위원도 36년이 걸렸지만 복직을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살기에 세상은 더 좋아진 걸까요.
“하청노동자들은 여전히 각종 사고들에 노출돼 있는데 조직화돼 있지 않아서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죠. 37년째 복직투쟁을 한 사람도 결국 복직이 되는구나 하고 심리적으로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 복직이) 현실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아요. (코로나 정리해고 1호 사업장인) 아시아나케이오는 지난해 1명이 정년퇴직하고, 5명이 남아 있는데 올해 2명이 또 정년을 앞두고 있어요. 창원 두산중공업에서 노조위원장을 했던 김창근씨도 정년을 넘긴 지 4~5년이 됐는데 복직을 위해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고요. 여전히 해고자들이 일터로 돌아가기 너무 어려운 상황이에요.”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86년 대공분실 끌려간 뒤 가택연금, 담 넘어 탈출
퇴직금 113만원은 전부 유인물 만드는 데 써”

- 시계를 36년 전으로 돌려서, 1986년 7월14일 해고 이후 생활은 어땠나요.
“퇴직금 113만원과 한 달에 2만원씩 꼬박 5년을 넣었던 재형저축으로 모은 돈을 전부 유인물 만드는 데 썼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인쇄를 해 주는 데가 없었고 위험수당이라고 10만원을 받았어요. 직접 전달하지는 못하고 집집마다 꽂아 놓고 가면 신기하게도 한 사람이 유인물을 공장으로 들고 와요. 그러면 500장만 뿌려도 서로서로 다 돌려보면서 읽어 보는 거죠.”

- 군사독재 시절 정권의 감시나 통제가 심하지는 않았나요.
“세 차례에 걸쳐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나온 뒤 가택연금이나 다름없게 (당시 어용) 노조간부, 회사 관리자들이 집 주변에서 감시했고 나중에는 경찰들이 통제했어요. 갇혀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지는 날 옥상으로 올라가서 옆집 담을 넘어서 나왔죠. 저는 부산에 아는 사람도 없고 그때는 저랑 아는 척만 해도 회사에서 잘리던 때여서 갈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부산역 지하도를 갔어요. 아마 제가 부산지역 최초의 노숙자였을 거예요. 좁고 어둡고 더러운 지하도에 있었는데 여름에도 너무 추웠어요. 용두산공원 벤치에 가서 자고, 사람들이 먹다가 버린 팝콘이나 김밥 같은 것들을 먹고 그랬어요.”

- 생계도 포기하고 엄혹한 감시 속에서도 유인물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까운 줄도 몰랐어요. 유인물을 뿌리면 제보가 많이 들어왔어요. 누가 다쳤는데 산재도 안 해 준다, 다른 조선소는 가족수당이 다 있는데 여기만 없다 등등. 이를 빽빽하게 채워서 ‘조공(조선공사)노동자신문’을 만들었는데 막상 이걸 누가 볼까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끼임사고를 당한 한 노동자 바지 속에서 피가 묻은 신문이 툭 하고 떨어지는 거예요. 그 아저씨가 신문 오탈자 하나하나에 동그라미를 그려 놨더라고요. 노동조건에 불만이 많았던 때고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컸던 거예요.”

- 2003년 해고자들이 복직될 때 김 지도위원만 경총의 반대로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섭섭한 마음은 없었나요.
“저도 인간이니까 섭섭했죠. 그런데 당시 김주익 지회장이 죽고, 곽재규 조합원이 죽고 공장 분위기가 너무 무서웠어요. 조선소에 블록 사이나, 치구대 밑 이런 사각지대가 많아요. 울려고 이런 데를 찾아서 가면 누군가가 먼저 와서 울고 있었어요. 김주익 지회장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도 밥은 먹었거든요. 그런데 재규가 죽고 나서는 아무도 밥을 안 먹어요. 그래서 뭔가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가 있었어요. 이 싸움을 빨리 끝내야 되는데 제가 복직이 안 됐다고, 될 때까지 하자고 그럴 수가 없었죠. 이후 제 복직이 임단협 때마다 요구 조건으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복직 대신 임금을 인상하고, 반찬 가짓수 늘리고, 통근버스 증차하고 이런 식이었어요.”

- 2008년에는 노사가 ‘김 지도위원에게 월 생계비 200만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잠정합의했는데 단호히 거절하셨죠.
“당시에 제가 황이라 동지랑 같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노조간부가 전화를 했더라고요. 노조에서는 이게 사측의 책임을 명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잘한 합의라고 기뻐서 전화를 했는데 제가 ‘못 받는다’고 하니까 되게 당황하더라고요. 저는 ‘복직을 하고 싶은 거지, 돈을 받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돈을 받으면 복직을 안 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말했죠. 부산 범일역에서 지하철도 못 타고 울었어요. 노조간부들에게조차 왜 복직을 하려고 하는지, 설명해야 되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희망버스로 세계 확장돼, 연대는 목숨”

- 2011년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위해 85호 크레인에 올랐고, 전국에서 ‘희망버스’가 찾아왔습니다. 김 지도위원에게는 어떤 경험으로 기억되나요.
“웃으면서 싸운다는 게 어떤 건지, 희망버스를 통해 알 수 있었어요. 그전에는 연대한다고 하면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조끼 입고, 비슷한 깃발들이 보이잖아요. 그런데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서 다른 방식의 연대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화이트칼라 블루칼라 구분 없이 일반 시민부터 학생들, 주부들, 사회 원로들, 국회의원, 문화예술인과 퀴어들까지. 조선소는 군필 남성의 ‘마초’ 조직인데 우리가 외롭고 절박하게 싸울 때 자신들이 터부시했던 사람들이 선뜻 달려와 줬고, 같이 뭔가를 해 보면서 생각도 달라지고 세계가 확장된 거예요.”

- 연대란 김 지도위원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거예요. 2003년과 2011년이 같은 상황이었는데 삶과 죽음이 오간 이유는 연대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2003년에도 정문을 뚫고 85호 크레인 밑에 3천명이 모였을 때 김주익 지회장이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라고 했고, 저도 희망버스 1차 때 첫 마디가 그거였어요. 희망버스는 1차에서 계속 이어졌던 거고, 2003년에는 그게 안 됐던 거예요. 노조에서 애를 써도 연대가 어려운 조건이었어요. 연대가 우리에겐 목숨일 수밖에 없어요.”

- 책 <소금꽃나무>에는 한복집, 대우실업, 시내버스에서 일할 때 성폭력을 목격한 경험을 담기도 했는데요. 여성노동자로서 김진숙의 삶은 어땠나요.
“열여덟 살에 공장에 갔을 때 다 여성이었어요. 열여덟이 나이가 많은 편이었어요. 열세 살 이하는 취업이 안 되니까 남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온 ‘위장취업자’들도 많았죠. 같은 과에 김영숙이 5명이고 이랬어요. 그런데 회사에서도 다 묵인했죠. 그들이 일을 안 하면 공장이 돌아가질 않으니까요. 어린 여성이 부려먹기에도 좋았던 거죠. 노동자들은 다 여성인데 관리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어요. 만지고 주무르고 지휘봉 같은 걸 등에 넣어 브래지어끈을 끊고 이런 건 그냥 일상이었어요. 그런데 성추행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어려서부터 그런 걸 다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괴로워하면서도 그냥 넘어가고 공공연하게 행해졌어요.”

“해고자 특별법 만들어서라도 명예복직해야”

- 김 지도위원의 복직이 시대의 복직이 되려면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동일방직·청계피복·YH와 삼화고무를 비롯한 신발공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복직권고를 받고도 한 명도 복직한 사람이 없어요. 저는 공장도 남아 있고 노조도 있어서 36년 만에 복직을 할 수 있었지만 저보다 먼저 해고된 노동자들도 복직 못 한 분들이 많아요. 사회가 언젠가 이분들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명예복직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줘야 해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그렇게 돌아가시게 해서는 안 돼요.”

- 새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윤석열 당선자는 후보시절 반노동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는데요. 윤 당선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간 검사의 눈으로 세상을 봤다면 이제는 대통령의 시각으로 세상을 봐야 해요. 노동자들이 범법자가 아니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대통령의 시각에서 이제는 봐야 해요. 검사의 외피를 좀 벗었으면 좋겠습니다. 검사의 외눈박이 사고가 아닌 두 눈을 다 뜨고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최저임금이 이 사회에서 왜 만들어졌는지, 누구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어떤 사람들의 투쟁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를 좀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일하는 데도 직접 좀 가 보시고 얘기도 좀 들어 보셔야 합니다. 기업인들 이야기만 듣지 말고요.”

- 복직 합의 이후 트위터에 “26일부터는 막살 겁니다” 라는 글을 올리셨던데, 해고자 김진숙이 아닌 인간 김진숙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계획돼 있나요.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여전히 싸우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으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겠죠. (두산중공업지회) 김창근 노동자에게도 한번 가보고, YH·동일방직·청계피복 선배님들도 한번 뵀으면 좋겠어요. 복직이 저한테는 인생의 가장 큰 문제였으니까 스스로 조심하고 통제하고 살았던 게 많거든요. 그런데 이제 가고 싶은 데도 가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지금부터 막사는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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