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한자 학습 만화책을 즐겨 보던 딸아이가 어느 날 내게 손바닥을 쭉 뻗으며 ‘바람 풍!’을 외쳤다. 엄청난 강풍에 떠밀리듯 나는 뒷걸음질 치며 벽에 부딪히고 만다. 어릴 적 자주 써먹던 장풍으로 반격에 나서보지만 매번 나가떨어지는 건 나였다. 친밀한 몸놀이를 오래도록 함께하는 게 내 작은 바람이다. 언젠가 한겨울 지리산에 올라 정상으로 향하던 길에 바람이 매서웠다. 수평으로 날아드는 눈발이 뺨을 아프게 때렸고 귀와 손끝이 아렸다. 한발 앞으로 내딛기도 쉽지 않았던 기억이다. 흔들흔들 된바람을 헤치고 오른 정상에서 본 아침 해가 더할 수 없이 멋졌다. 잠자리에 누워 딸아이에게 자주 들려주는 아빠표 옛날얘기 중 하나다. 앞으로 크고 작은 시련을 무수히 겪을 아이가 쉬이 포기하지 않고 씩씩하게 맞서는 힘을 키웠으면 하는 게 또한 내 바람이다. 길에 서는 일은 바람을 벗 삼는 일일 텐데, 해도 해도 좀 심한 날이 있다. 저임금 문제 해결하라며 하루파업에 나선 콜센터 노동자들 머리칼이 제멋대로 휘날려 엉켰다. 바람 맞아 시린 눈을 자주 질끈 감았다. 내내 바람이 그칠 줄을 몰랐다. 기어코 그 앞 무대에 걸어 둔 현수막이 잔뜩 부풀다 뜯어지고 말았다. 노조 사람들이 그 옛날 뱃사람들 돛 다루듯 잡아 버티고 있다. 별일 없이 처우개선 바람 적은 결의문을 읽어 내렸다. 마무리 구호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뒷자리 놀던 아이가 모니터 속 사진을 보면서 이 사람들 뭐 하는 거냐고 묻는다. 아이가 길에 선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사정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컸으면 하는 게 아빠 평소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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