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에서 매일 사고로 죽는 노동자수는 아홉 명에 달한다. 재해를 당하는 노동자는 매년 300만명을 넘는다. EU 회원국에서 일로 인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018년에만 3천332명에 달했고 그해 상병(부상과 질병)의 피해자가 된 사람도 310만명에 이르렀다. 또한 매년 12만명이 일 때문에 암에 걸리며, 이 가운데 8만명이 죽는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노총(ETUC)은 ‘비전 제로(Vision-Zero)’를 내세우고 있다. ‘비전 제로’는 EU 집행위원회가 지난해 6월 발표한 ‘EU의 일터 안전보건 기본전략(EU Strategic Framework on Health and Safety at Work 2021-2027)’에서 제시된 것으로 일로 인한 죽음을 ‘제로(0)’로 만들겠다는 정책 목표다. 유럽노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로 인한 죽음뿐만 아니라 일로 인한 부상과 질병도 ‘제로(0)’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EU 회원국들이 EU 기준에 맞게 ‘비전 제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걸음은 사고 예방을 위한 체계적인 산업안전보건 계획을 만들 책임이 사용자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유럽노총은 강조한다. 물론 사용자의 안전보건 계획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노동조합과의 철저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비전 제로’ 실현을 위해 유럽노총이 사용자 책임 다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회원국 정부의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법집행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기적인 근로감독 실시에 더해 해당 산업의 노동자를 조직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안전보건 대표자와 감독 당국이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유럽노총은 EU 회원국들의 근로감독 건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평가한다. 주된 이유는 회원국 정부가 근로감독을 위한 인력과 자원에 투자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노총은 회원국들이 국제노동기구(ILO)가 권고하는 최저 기준인 노동자 1만명당 감독관 1명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용자가 안전보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때, 강력한 감독과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럽노총은 안전보건과 관련해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한 문제로 △코로나19 대응 △화학물질 사용 △근골격계질환 △스트레스와 심리사회적(psychosocial) 위험 △일터의 폭력과 괴롭힘을 꼽는다. 코로나19로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불안해지고 수입이 감소했는데, 노동시장의 하층에 자리한 노동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 노동시장 중상층에 자리한 노동자들도 재택근무로 직장과 가정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이렇듯 코로나19는 노동시장의 전반에 충격을 주면서 노동자들을 걱정과 불안에 빠트리고 있다. 노동자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심리·사회적 위험이 커진 것이다.

유럽노총은 EU 회원국에서 일로 인한 사망자의 53%가 암 때문이라는 2015년 조사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일터에서의 발암 물질과 돌연변이 물질에 관한 EU 지침’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근골격계질환은 EU 회원국에서 가장 흔한 직업병으로 수백만 명이 고통을 받고 있다. ‘2019년 유럽 기업의 위험요인에 관한 조사(2019 European Survey of Enterprise on New and Emerging Risks)’에 따르면, 노동자의 60%가 근골격계 문제로 일터와 가정에서 삶의 질이 떨어졌다고 답했다. 유럽노총은 근골격계질환으로 인한 병가와 장애, 그리고 조기퇴직으로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손실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성·이주노동·장애·저학력·동성애·청소년·노인 같은 취약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폭력이나 심리·사회적 폭력도 심각한 안전보건 문제라고 유럽노총은 강조한다. 일터의 위험요소를 평가하고 예방조치를 설계할 때 노동자들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반영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마지막으로 유럽노총은 기후변화와 플랫폼 작업, 인공지능과 디지털화가 일의 세계에서 야기하는 새로운 위험들에 대해서도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U 집행위원회가 코로나19를 직업병으로 인정한 것을 환영하면서 ‘비전 제로’ 실현을 위해서는 안전보건 조치의 설계와 실행에서 노동조합의 적절한 개입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로 인한 죽음의 피해자를 ‘제로’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일로 인한 부상과 질병의 피해자를 ‘제로’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는 유럽노총의 ‘비전 제로’ 캠페인은 중대재해처벌법을 막 시행한 한국에 여러 가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윤효원 객원기자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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