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정의당 정책위, 한국도시연구소 주최로 30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열린 서울지역 노동자 주거실태조사 결과발표 토론회 및 증언대회에서 건설·청년·여성·비정규 노동자가 주거 실태를 증언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19년 동안 남의 집을 지었지만 아직 내 집은 못 지어 봤습니다. 자동차회사나 전자회사는 직원 할인이 있는데 건설노동자에게는 할인이 전혀 없습니다. 가족들은 경북 포항에 집을 얻어 살고 있고, 저는 서울의 임대아파트에서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서울에서 다시 같이 살 수 있을까요?”(건설노동자 예성일씨)

민주노총 서울본부·정의당 정책위원회·한국도시연구소는 30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서울지역 노동자 주거실태조사 결과발표 토론회 및 증언대회’를 열었다. 예씨는 “‘부모 찬스’ 없이는 자력으로 서울에 집을 마련하기 어렵다”며 “일용직 노동자는 평생 일해도 자기 집 한 칸 갖기 힘들다”고 말했다.

“값비싼 월세에 장시간 통근·심야근무로 내몰려”

비싼 임대료에 탓에 ‘서울 입성’에 실패한 청년노동자들은 장시간 통근을 강요받고 있다. 민주일반노조 상근활동가인 권도훈씨는 “경기도권 대학 입학 후 기숙사·원룸텔·고시텔을 전전하다가 군 전역 후 운 좋게 LH 청년전세임대주택에 당첨돼서 살고 있다”며 “서울로 이사를 가기 위해 전셋집을 알아봤더니 가진 돈으로는 반지하 집밖에 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권씨는 “경기도에 살면서 1시간40분씩 통근하고 있다”며 “비싼 돈을 주고 월세를 살 바엔 교통비를 쓰는 게 낫다”고 토로했다.

월세 부담에 서울 노동자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콜센터 노동자 조혜령씨는 “아이 교육을 위해 강북구 전세에서 45만원짜리 노원구 월세로 이사했다”며 “아이 친구들이 ‘너희 집은 정말 이상하게 생겼다’고 놀려서 70만원짜리 21평 월셋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말했다. 조씨는 “월세를 부담하기 위해 3년 전부터 심야근무를 했더니 이런저런 병에 걸렸다”며 “내가 암에 걸려도 아이 친구들을 초대해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비정규 노동자 김관후씨는 “신림동에서 50만원짜리 월세에 살고 있는데 4개월 후에 재계약해야 한다”며 “집주인한테 연락이 왔는데 ‘보증금을 올리겠다’고 말할 것 같다”고 호소했다.

서울 노동자 52.6% 주거비 부담
문화생활비·식료품비 줄여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한국도시연구소가 지난 9~10월 서울지역 노동자 1천227명을 조사한 결과 ‘현재 집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52.6%가 “주거비 부담”을 꼽았다. 이어 “주택의 열악한 시설”(11.8%), “통근·통학의 어려움”(9.6%) “이웃 간의 갈등”(4.4%)순이었다. 주거비가 부담스럽다고 응답한 노동자 가운데 31.5%가 “취미·문화생활비를 줄였다”고 답했다. “식료품비를 줄였다”(22.6%) “빚이 늘었다”(19.8%)는 응답도 많았다. 비정규 노동자의 경우 “부업을 하거나 노동시간을 늘렸다”는 응답이 19.2%로 정규직(11.2%)에 비해 8%포인트 높았다.

‘내 집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79.4%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응답자 42.7%만 자가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30대 노동자와 30세 미만 노동자의 자가 거주 비율은 각각 30.1%, 24.7%였다. 임차 가구로 살면서 느끼는 불안함으로는 68.6%가 “재계약시 보증금·임대료 상승 또는 월세 전환”을 꼽았다.

이원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상위 40%를 제외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정체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대출 확대나 분양주택 공급 같은 자가소유 촉진 정책으로 서울 노동자들의 자가 점유율이 증가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며 “자가소유 촉진 정책은 집값 상승을 견인하는 요인으로 작동해 서울 노동자들의 주거 문제를 더욱 고착화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 책임연구원은 주거 안정 방안으로 △공동근로복지기금 등 사업주 기금을 통한 주거지원 강화 △매입임대주택을 활용한 노동자 임대주택 공급 △서울시 임대료 인상률 제한 조례 제정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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