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1980년대 중반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제헌의회(Constitutional Assembly)를 소집하자”고 주장하는 흐름이 있었다. 이들의 대척점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흐름이 있었다.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군사파쇼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 제헌의회 소집 흐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이에 따라 수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실현됐다. 이는바 87년 체제의 성립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87년 체제를 타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중은 이 헌정체제하에서 정치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반면 지배계급은 지배계급 내 정파 간 권력쟁탈전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므로 정치가 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에 충실하게 복무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이것을 권력이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돼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분산하거나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헌법을 개정해서 권력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제헌 이래 우리나라 헌법 개정 역사는 이런 식으로 권력구조를 개편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이승만은 1952년 대통령 국회 선출제를 국민 직선제로 바꿨고, 1956년에는 자신에 한해 중임제를 철폐하는 4사5입 개헌을 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자며 내각제 개헌을 했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대통령제로 개헌했고, 1969년 대통령 3선 금지를 폐지하는 3선 개헌을 했다. 1972년 대통령을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간접 선출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신헌법을 선포했다. 이 유신헌법은 1980년 전두환·노태우의 5·18쿠데타로 5공 헌법으로 개정됐다. 대통령은 선거인단에 의해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선출했다. 이 헌법은 6월 민주항쟁의 호헌철폐 투쟁으로 폐지돼 대통령을 국민이 직선하는 87년 헌법으로 대체됐다.

그러면 지배계급이 실행한 이 일련의 개헌과 권력구조 개편이 나라의 정치⸳경제 체제를 변혁하고 노동자·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는가. 아니다. 직선제냐 간선제냐와 상관없이 이승만 정권은 제주4·3학살과 보도연맹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양민학살과 정적살해를 범했다. 내각제하의 장면 정권은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 했으며, 교원노조를 불법시하고 탄압했다. 이에서 보듯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하는 권력구조의 차이는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없다. 유신헌법·5공 헌법 같은 파쇼헌법을 폐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권력구조 개편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개헌에 민중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문재인 정권의 개헌안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87년 헌법을 그대로 두자는 것인가. 아니다. 그 정반대다. 87년 헌법이나 그 전 헌법이나 우리 헌법은 모두 자산계급 민주주의 헌법이다. 이 헌법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정치 체제를 최고규범화한다. 이 헌법은 사유재산권을 신성한 권리로 치켜세운다. 따라서 이 헌법하에서는 독점재벌을 해체할 수도, 부정축재재산을 몰수할 수도 없다. 민중 주거권을 보장하는 택지국유화와 주택의 재분배를 실행할 수도 없고, 사립학교를 몰수해 국·공립으로 전환할 수도 없다. 모두 신성한 사유재산권에 저촉된다. 남아프라카공화국은 지금 민중의 숙원인 경자유전으로의 농지개혁이 사유재산권을 떠받드는 헌법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행 헌법은 또 ‘자본의 자유’,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기초로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고용해 잉여노동을 착취하고 이윤을 증식하는 행위를 영리추구의 자유라며 신성시한다. 이것을 규제하면 자유의 침해로 규정된다. 이것을 방해하면 업무방해로 민·형사처벌된다. 반면에 이 헌법 체계 아래서 노동자·민중의 생존권과 사회적 권리는 거의 무시된다. 혹 이런 사회적 권리를 헌법에 명시하는 경우에도 매우 추상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법률에 의해 얼마든지 무력화될 수 있게 허용한다. 예컨대 헌법 33조에 노동 3권을 보장한다고 적혀 있지만 이 권리는 치안유지법적 하위 법률에 의해 형해화돼 있다.

현행 헌법 아래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도 않고 국민에게 있지도 않다. 주권재민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을 선거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노동자·민중이 진정한 주권자가 되는 길은 체계적으로 봉쇄돼 있다. 진정한 주권재민이 되려면 여러 장치가 필요하다. 예컨대 국회는 지역대표와 더불어 정당비례대표가 아닌 노동자·농민·소자산가·자산가 같은 계급대표로 구성돼야 한다. 그리고 국회의원 소환제, 대통령 결선투표제와 중간평가제도 필요하다.

대장동 사건에서 보듯이 선출되지 않은 법조권력이 부동산 투기세력의 버팀목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런 부정·부패는 3권 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에 의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민중의 통제하에 둠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은 국민에 의해 선출돼야 한다. 지자체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정치검찰·수구사법을 뿌리 뽑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실시돼야 입법·사법·행정 등 정치가 재벌과 특권층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헬조선 ‘지옥’에서 탈피해 참된 민주공화국을 만들려면 이런 급진적 내용이 들어가는 새로운 헌법이 제정돼야 한다. 이 제헌은 권력구조 개편에다 토지공개념을 가미하거나, 선언적으로 ‘노동중심의 자주평등 공화국’을 헌법 1조에 넣는 식의 개헌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이런 제헌을 위해 참 진보 대통령 후보는 제헌의회 소집을 공약하고, 당선되면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지금 남미에서는 제헌의회 소집을 통한 헌법제정이 하나의 추세가 되고 있다. 베네수엘라·볼리비아에 이어 칠레에서 민중봉기로 제헌의회가 소집되고 제헌이 진행되고 있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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