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철 경희대 교수(후마니타스칼리지)

‘노회찬 6411 정신’이라는 말의 의미, 또 그것의 살핌은 노회찬이라는 한 정치인의 삶을 찬양하거나 조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6411 정신은 ‘노회찬의~’라고 부를 때조차 그의 소유물임을 뜻하지 않는다. 노회찬이라는 인물도 그렇지만, 6411 정신은 시대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그 시대를 노회찬과 함께 견뎌 내고 돌파한 사람들의 것이다. 노동존중을 구현하기 위해 진보정치를 요청한 시대, 그리고 진보정당에 삶을 몽땅 갈아 넣어야 했던 사람들의 염원인 것이다. 아직 실현되지 못한, 아니 그 실현이 아직도 한참 남거나 불투명한, 그래서 포기하고 싶기도 한, 하지만 주섬주섬 다시 일어나 챙겨야만 하는 꿈이다. 지금 하필 노회찬 6411 정신의 의미를 짚어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노회찬의 6411 정신을 -그의 이름이 아닌- 노동존중과 진보정치의 맥락 속에서 우선 살펴야 할 이유다.

노동은 본디 ‘민(民)’의 것이다.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어서 그렇다. 인류문명은 바로 민의 노동에 의해 발전해 왔다. 노동자를 ‘역사를 지고 나갈 위대한 주체’로 호명했던 이유다. 하지만 민은 존중받지 못했다. 문명(공동체)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즉 시민(주권자)이 아니었다. 민이 누구인지는 글자의 모양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찬찬히 들여다보라. 민은 기구를 사용해 땅을 가는 사람 혹은 손이 밧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의 형상이다. 권력자와 부자에게 정복당해 고된 비자발적이고 강제적 노동에 시달리는 다수의 피지배자들인 것이다. 권력과 부를 독차지한 지배자들이 민을 존중하지 않았던 이유다.

사정이 좀 달라진 것은 근대문명에 들어서다. 아니, 주인과 노예 간의 온정성마저 완전 삭제하고 사람을 기계의 부품과 숫자로 취급하는 근대문명의 가공할 몰인간성에 저항해 고대문명의 아이디어인 민주주의를 다시 불러내면서다. 민주주의는 전복의 질서다. ‘피지배자(Demos)가 지배(Kratos)하는 체제’를 뜻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으로 불린 민은 민주주의를 내건 ‘혁명’을 통해 비로소 시민이 돼 자기결정권을 지닌 온전한 인간의 이름을 얻었다. 이때 얻은 텍스트가 바로 ‘헌법’이다. 이후 민주주의는 헌법에 기초한 질서, 즉 헌정체제와 동일시된다. 하지만 민은 ‘절반의 주권자’에 불과했다. 세상의 현실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헌법의 문구와 같지 않았다. 단순한 괴리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지배를 용인할 수 없는 의도적 ‘재전복’이었다. 민주주의는 헌법의 보유 혹은 법적 절차와 형식을 갖춘 것으로 한정됐다. 대략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8세기 후반에 시작돼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끝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수십여년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민주주의는 (기존)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불가피한) 동의를 얻어 다시 지배하는 체제로 모양새만 바꾼 질서를 의미하게 됐다. 결국 그 후부터 지금까지 민은 여전히 시키는 노동만을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손목 묶인 피지배자다.

그래도 민주주의 역사를 일찌감치 겪은 서구 사회는 우리가 사는 한국에 비해 사정이 비교적 나았다. 노동‘계급’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집합적 정치 주체’로 등장했고, 약자의 유일한 생존의 무기인 조직재화, 즉 노동조합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교섭 권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도 의회와 선거 같은 형식과 절차만 살아 움직일 뿐, 민의 주권 보장과 행사는 민주주의 이전보다도 못하다는 ‘포스트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선 지 꽤 됐다. 하지만 노란 조끼 시위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유럽의 민은 정치·사회적 영향과 인정을 획득한 저항을 통해 교섭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민주화 34년이 지나고 노동존중을 기치로 내건 정권이 들어서고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한 지 17년이 지났는데도 그러하다. 노회찬의 6411 연설은 그 와중에 등장했고, 그의 사후 남아 있는 후배들이 노회찬 정신 혹은 6411 정신이라는 모토를 조성했다. 다시금 혹은 새롭게 노동존중의 구현과 그것을 이룰 진보정치의 꿈을 지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다. 아니 오히려 한층 더 열악해졌다. 그런 중에 괄시받는 노동자라는 신분마저도 얻기 전에 어린 학생들이 실습현장이라는 이름의 위법한 -혹은 변태적인- 일터에서 생명을 잃는다. 살아있다면 당연히 만사 제치고 달려갔을 그 비극적인 죽음의 실습장에서 노회찬은 어린 생명을 지키지 못한 것을, 그의 주권자적 지위와 권한을 보장하지도 행사하게 해 주지도 못한 것을 다시 또다시 부끄러워하면서 노동존중과 민주주의 본질의 구현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지금 그의 진보정치 후예들이 그러하듯이. 노회찬의 6411 정신은 그런 것이다. 노동존중을 정치시장의 브랜드로 소비하고 아예 반노동적 지향성을 드러내는 사람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정치질서, 즉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가짜 엘리트 과두정치는 조국 사태에서부터 작금의 화천대유 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도덕적 정당성은 물론이고 시민의 전략적 간지 차원에서의 지지 의사마저도 상실한 듯하다. 노회찬의 6411 정신이 그런 거대 양당정치를 넘어서고자 하는 마음과 지혜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길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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