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혹자는 ‘공정’이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이 말을 가장 즐겨 쓰는 사람은 “사회적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일인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이며. 정치인 가운데도 가장 영향력 있는 자인 대통령과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유력 정치인들이다.

여권의 유력 대선후보 이재명은 자신의 정치적 지표를 ‘공정과 성장’이라고 규정했다. 야권의 유력 대선후보 윤석열은 ‘공정과 상식’이라고 했다. 여권의 또 한 명의 유력 후보 이낙연은 문재인 정부의 계승자를 자임하는데, 문재인 정부의 지표는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이며, 그 가운데 으뜸은 ‘공정’이다. 야권에는 지금 다른 대선후보들보다 당대표가 더 시선을 끌고 있는데, 이준석은 ‘공정’을 자신의 상표로 삼고 있다. 그는 2019년 <공정한 경쟁>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정도면 공정이 여야를 망라한 제도 정치권의 공통된 핵심가치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힘, 즉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이 공정이라는 말을 많이 쓰면 국민도 그 말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며, 이때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사상은 부지불식간에 국민 속에 침투해 내면화된다. 19세기의 유명한 사상가 칼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어느 사회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배계급의 사상에서 해방돼야만 민중은 피지배계급의 처지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운동은 이 ‘공정’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이런 공정이라는 가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피지배 민중의 것이 아니다. 농민이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의 가치기준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지배계급의 가치기준은 ‘성장’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대놓고 ‘선 성장 후 분배’를 내세우며 성장을 통해서 물질적 풍요를 실현한다는 비전과 가치를 제시했다. 이런 가치기준이 강력하게 관철된 결과 지금도, 그리고 이른바 MZ세대에도, 이것이 많이 내면화돼 있다.

그 대척점에 있는 민중의 가치기준은 ‘공평’이었다. 민중은 사회적 가치의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염원했다. 전태일 동지는 소설 초안에서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하물며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연소자들이 때 묻고 더러운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라고 썼다. 그는 또 일기에서 “불공평한 분수에는 공평한 대수를”이라고 썼다. 이 공평은 전태일만이 아니라 민중 일반이 지향한 가치였다.

공평이란 무엇인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소농민적 가치다. 농민들에게는 모두가 고르게 토지를 소유하고 그에 따라 소득과 생활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이뤄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저에게는 휘황찬란한 물질문명의 베일보다 외딴 초가집의 그을음 끼는 등잔 밑에서 노할아버지의 고담이 더욱 좋습니다. 밤이 되면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자동차의 행렬이 불꽃 성을 이루는 도시의 소음보다는 귀뚜라미 소리 단조로운 사랑방에 동네방네 친구들과 사랑의 토론이 얼마나 멋있을까요.” 그런데 자본은 성장의 가치를 내세우며 이 공평의 가치를 억압했다. 이 두 가치가 날카롭게 충돌한 것이 전태일의 분신항거였다.

이 두 가치기준의 대립에서 물론 자본의 것이 우세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80년대 후반 3저호황과 1990년대 신자유주의 도입을 거쳐 새천년 선진자본주의로 나아가면서 지배적이 됐다. 이런 내적 조건에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외적 조건이 겹치면서 자본의 가치기준은 더욱 지배적으로 됐고, 공평은 더욱 뒤로 밀려났다. 이때 공평을 대체해 등장한 것이 공정이다. 그런데 이 공정은 공평처럼 성장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추구하면서 그것에 부차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 “땀 흘려 일하는 만큼 공평한 몫을 분배받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공평’과 ‘공정’을 내세웠던 이재명이 이번에는 ‘공정성장’을 내세우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고 비판된다.

실제로 공정은 성장을 추구하는 가운데 성장의 과정을 합리화하자는 것이다. 노무현의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공정’ 하면 떠오르는 것은 공정거래 또는 공정무역이다. 더 좁게는 이준석이 말하는 것과 같은 공정경쟁이다. 이처럼 공정은 대개 거래나 경쟁의 방식에 관한 것이며, 출발조건의 평등이나 결과의 공평분배는 포함하지 않는다. 기껏 자본주의적 가치인 ‘기회균등’과 ‘비례적 평등’만 포함한다.

이에 진보 일각에서는 공정이 평등과 정의의 가치를 주변화한다고 비판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 되고 있는 것은 불공정이 아니라 불평등, 재산·소득·교육·향유 등에서의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맞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한계가 있다. 전태일의 경우에서 보듯이 공평에서는 비록 소농민적인 관점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적 착취·지배·예속과 자본주의적 인간상에 대한 비판 및 그 대안으로서 노동해방·인간해방 지향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공정에는 이 반자본주의가 없으며 오히려 자본주의 질서를 기정사실화한다. 공정에서는 소수의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다수의 인간을 임금노예처럼 착취·억압하고 비인간화하며, 그로써 치부하는 것은 전혀 불공정하다고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뛰어난 능력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획득한 것이므로 훌륭하다고 평가된다. 이같이 자본주의의 뿌리 깊은 불의를 전제하고 긍정하므로 그 ‘공정’은 실질적으로는 ‘불공정’이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결국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하고 자본주의를 미화하는 보수 가치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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