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유족의 호소

지난 6월26일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되고, 언론보도가 나온 뒤 7월11일엔 한 대선후보가 서울대를 방문해 정치 쟁점으로 번졌다. 2년 전에 있었던 청소노동자의 죽음을 다시 일깨우며 8월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진 뒤에야 나는 유가족이 나오는 동영상들을 봤다.

배달도 했던 유가족은 사고를 한 번이라도 당해 보면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라는 걸 안다고 했다. 그런데 왜 그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할까. 미국 대통령이 항공우주국(NASA)에 가서 청소노동자들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을 때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 일을 한다”고 했다고 한다. 서울대 청소노동자는 최고의 지식인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런데 한국은 일에 대한 이런 자부심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그분은 없이 사니까 노조를 개입시켜 뭔가라도 더 얻으려 한다는 일부 교수의 생각을 개탄했다. 소유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인정”이라고 했다. 교수와 학생만으로 대학은 유지되지 않는다. 청소하고 건물을 유지하고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 여러 노동이 모여 대학이 유지된다. 그러나 “내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높여 봐야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라는 유가족의 얘기에 가슴이 미어졌다. 존재를 인정받고 차별 없이 권리를 누리는 ‘보편적 시민’이 되는 것이 이토록 어려워야 할까.

공백을 채우는 ‘빽’

살기 힘든 개인의 불만은 국가에 대한 원망으로 향한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국가는 평범한 개인들에게 멀리 있는 강력한 기구고 시장은 냉혹한 경쟁을 통해 고립된 개인을 만든다. 국가와 시장 사이, 국가와 개인 사이에 빠진 것은 다양한 사회다. 힘없는 개인들이 의지할 수 있는 ‘빽’(Background)이자 뒷배가 필요하다. 가족이나 부모를 비롯한 각종 ‘찬스’ 없는 사람들의 힘이 곁에서 힘이 되는 집단들이 ‘사회’를 이룬다.

사회는 개인들에게 뒷배일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만드는 시장과 시민의 삶을 살피지 못하는 국가에 정의를 불어넣는 장치다. 국가와 개인, 국가와 시장 사이의 공백을 채워야 할 그 자리에 노조가 있다. 공백을 채우기 위해 노조는 진화한다. 세계 곳곳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이론과 분석이 나오는데, 종종 노동조합은 미래에는 사라질 조직이라는 예측도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노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은 ‘100만 노총 시대’를 지났다. 하지만 이런 표현이 무색한 현실이다.

남은 공백들이 있다. 첫 번째 공백은 노조의 외부다. 취약하기에 더 절실한 5명 이하 사업장은 늘 법적 보호의 밖으로 밀려난다. 늘어나는 플랫폼 노동과 여전한 무노조 기업들은 노조 외부의 공백이다. 공백을 채우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노조가 없어도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단체교섭을 전체 노동자에게 적용하는 ‘단체교섭 효력확장’제 같은 방안들이 있지만 아직 요원하다. 가장 확실한 것은 노조 없는 곳에 노조를 만드는 것이다. 노조할 권리를 위한 활동은 꾸준하고 사각지대 노동자를 위한 공제회, 공제플랫폼 등 새로운 시도도 있다.

두 번째의 공백은 노조 안에 있다. 뜻하지 않은 사건을 통해 공백을 확인한다. 사무기술연구직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며 등장한 노조들은 내부 공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MZ세대 노조’로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조 내부 공백으로 보고 이를 채우려 한다. 한편으로는 노조 내 민주주의 발전 가능성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과 능력을 앞세워 차별을 주장하는 것을 우려한다.(8월19일 청년유니온 논평 ‘정규직화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조합, 그것은 공정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특권과 무권을 없애는 대압착

시민은 서로 다른 곳에 산다. 지방과 수도권과 강남에 사는 시민들이 있듯이 특권지대에 사는 소수 특권층, 무권지대에 사는 다수의 무권리층, 보편적 권리를 누리는 일부 시민층으로 갈려있다. 특권층과 무권층이 사라지고 권리를 누리는 보편적 시민의 공동체가 바람직한 사회모델이다. 나는 이것을 ‘적정시민’의 ‘적정사회’로 표현해 왔다.

이런 사회를 향한 발상을 다양한 곳에서 발견한다. 이효리는 자꾸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주문에 “아무나가 돼도 괜찮다”며 공감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엘리트 특권층이 아닌 보편적 시민이 되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노동계에선 “상박하후”를 얘기하기도 했는데, 이는 무권층에 더 많은 권리를 주고 특권층의 권한을 줄이자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대압착(great compression)’을 주장했다고 한다.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 간의 소득격차, 그리고 계급 내부의 소득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얘기다.

노조는 노조할 권리를 넓혀 무권리 지대를 줄이고, 특권에 맞서 시민 권리를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보편적 시민을 탄생시키는 시스템’이다. 계급을 강조해 온 기존 민주노조의 시각에서는 계급이 아닌 시민을 강조하면 못마땅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된 민주노조가 왜 귀족노조 프레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지 돌아보자. 노조는 ‘계급을 잊은 시민’과 ‘시민을 잊은 계급’이 아니라 ‘노동시민’이 탄생하는 학교가 돼야 한다. 이런 노조의 개념과 존재 이유를 실천하는 노력이 더욱 늘어야 한다.(유사한 주장의 하나로 매일노동뉴스 8월17일자 정혜윤 칼럼 “노동자·민중에서 보편적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로” 참조)

보편적 시민을 형성하는 노조

두 개의 장벽이 있다. ‘정치적 도구화’와 ‘상업적 도구화’다. 국가와 개인 사이의 공백을 메워야 할 노조가 정치적 도구화에 빠지면 공백은 채워지지 않는다. 민주노조를 정치적 도구로 여기는 ‘정파과두제’를 넘어 합의선출제, 순환선출제, 현장간부 추첨제 등 새로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시장과 개인 사이의 공백을 채워야 할 노조가 시장처럼 상업적 도구화에 빠지면 공백은 그대로 남는다. 노조를 이익 도구로 여기면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게 된다. 정파에 의한 노조의 권력 도구화에 대한 반발과 실리주의 강화 등 복합적 요인이 작동한 결과로 기존 민주노조에서 탈퇴해 탄생하는 노조에서 이런 모습이 엿보인다. 민주노조가 내부 공백을 채우지 못하면 이런 일은 계속될 수 있다.(매일노동뉴스 7월2일자 “노조는 이익단체, 교원노조 역할은 교사가 교육 전념하게 하는 것” 교사노조연맹 위원장 인터뷰 참조)

중력이 큰 별을 지나면 시간과 공간이 휜다. 이처럼 권력에 의한 ‘정치적 도구화’와 시장에 의한 ‘상업적 도구화’의 힘을 이겨 내면서 나아갈 때 ‘보편적 시민을 위한 노조’들이 삶의 공백을 더 풍부하게 채울 것이다.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jogjun@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