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말은 명확하지 못하고, 행동은 방향이 없다. 대선을 앞둔 이 나라에서 노동의 말과 행동이 더욱더 그러하다. 이런 세상에서 그나마 8·15 광복절이 있었기에 지난 한 주는 조금은 달랐다고 해야 하나. 친일 민족반역과 자주독립 애국으로 세상을 명확히 갈라 기념할 수 있는 날이 있어서, 그 하루만이라도 머리가 선명히 맑았다며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흐리멍덩한 세상이다. 노동과 자본으로 세상을 갈라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선 긋기조차 힘겨워 보이고, 그은 선은 희미해진다. 이런 세상에서 노동자가 노동자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온전히 말하고 행동하기는 힘이 든다. 바로 이런 날에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했다는 소식을 읽었다.

현대제철 사내하청 노동자가 지난 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대기업의 자회사를 통한 불법파견 은폐, 정부가 직접 나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는 뉴스였다(2021년 8월10일 매일노동뉴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 2010년 사내하청업체 소속 근로자로 입사해 12년째 일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인 그는 “현대제철은 당장 불법파견 범죄행위를 노동자들에게 사과하고 법에 판결에 따라 돈을 벌어들인 만큼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해 기업의 사회적 본분을 다해야 한다”며 “정부가 법원의 판결과 고용노동부의 시정지시가 제대로 이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사용자 자본에 대해서 명확히 서서 노동자로서 호소하고 있었다. 현대제철이 최근 자회사 현대ITC를 설립해 불법파견 논란이 있는 사내하청 노동자 7천여명을 고용하겠다고 추진하는 데 대해 그는 이렇게 분명하게 부당하다며 국민청원하고 있었다.

2. 그동안 현대제철에서 자회사를 설립해 정규직 전환을 추진한다는 데 대해서 나는 여러 차례 기자들로부터 문의를 받고 답변을 했었다. 처음에는 근로자지위소송 등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위반을 피하고자 추진하는 것일 거라고 대답을 했었고, 최근에는 소송취하나 부제소확약을 통해 파견법상 권리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했다. 현대제철이 자회사 현대ITC 설립을 추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내가 대답한 대로였다. 앞을 내다보는 대단한 혜안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현대차 등 이 나라에서 사내하청 노동자의 수많은 소송과 투쟁, 그에 대한 원청 사용자의 대응을 보았던 경험으로 대답했을 뿐이다.

“현재까지 현대제철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청구 또는 동종·유사한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한다” “현대제철을 상대로 현대제철과 협력업체 사이의 법률관계가 적법 도급관계가 아님을 전제로 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협력업체에 근무했던 기간의 근로관계와 관련해 현대제철을 상대로 임금·상여금 등 명목을 불문하고 금품을 청구하는 소송을 비롯해 일체의 민사·형사·행정상 및 기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기존 협력업체와의 근로계약, 취업규칙, 단체협약, 임금협약 기타 노동관행 등을 근거로 현대제철이나 현대ITC를 상대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과거 현대차 등의 부제소확약서와는 표현은 다소 달리하고 있지만 파견법상 권리 주장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임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부제소확약서는 밝히고 있다. 파견법 위반의 범죄행위를 반성하고 사용사업주로서 파견법상 직접고용 의무 이행을 위해서 자회사 설립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렇게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서명해 제출하도록 한 부제소확약서의 내용을 통해서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현대제철은 이런 부제소확약서에 서명해 제출해야만 자회사 소속 근로자로 채용해 주면서 기존 사내하청업체와는 더 이상 도급계약을 유지하지 않고 있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내하청 노동자에 ‘자회사냐 해고냐’ 선택을 강요하면서 파견법상 권리 포기를 압박하고 있다. 그래서 벌써 몇 천 명이 부제소확약서에 서명해 제출하고서 자회사 채용을 선택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겠다. 청와대에 국민청원한 사내하청 노동자는 파견법상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3. 사내하청 노동자로 해 왔던 일자리마저 잃게 될까 봐, 파견소송을 통해 최종적으로 승소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는 것이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기간 동안 고용이 불안해서…. 지금 현대제철에서 부제소확약서에 서명해 제출하면서 자회사 소속 근로자로 되고자 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난달 30일 현대제철이 15곳의 사내하청업체에게 도급계약이 종료된다고 통보했다니 이런 생각을 좀처럼 떨쳐낼 수 없었을 것이다.

현대제철 사내하청 노동자 중에서 파견소송, 즉 원청 현대제철을 상대로 파견법상 직접고용을 주장해서 근로자지위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노동자는 다수가 아니다. 이미 고등법원까지 승소판결을 받고서 대법원 재판이 진행 중인 순천공장을 제외하고서 보면, 사내하청 노동자 중 소수가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송을 통해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 않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비정규직노조에 가입하고 있지 않다. 그동안 당진공장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조직화 투쟁을 전개해 왔음에도 이것이 현실이다.

사용자 자본에 대해 노동자는 단결하고 있지 못하다. 노동자 대다수는 조직돼 있지 않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노조 조직률이 다소 높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대다수 노동자는 단결하고 있지 못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냉정히 말한다면, 노동자로서 단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한민국에서 노동자 대다수는 노조에 가입해서 활동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무엇을 탓해야 할까. 분명히 대한민국 헌법은 노동자에게 단결해서 활동할 수 있도록 노동기본권을 보장했음에도, 노동자 대다수는 단결해서 활동하는 걸 포기하고 있다는 것인데, 법적 권리 보장과 우리 노동 현실이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노동자로서 단결하는 것보다 단결하지 않는 것을 대다수 노동자가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조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다는 걸 몰라서는 분명히 아니다. 알고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다. 노조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바람직하다고 제각기 판단해서 대다수가 하지 않는 것이다. 사용자 자본과 권력을 탓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의 탓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그것으로 모두가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은 나름대로 이해득실을 따지는 노동자의 계산을 보게 되는 걸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계산의 끝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불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사용자 자본에 대해 명확하게 노동으로 자신을 규정짓지 않고 있다는 걸 파악하게 될 것이다. 자본에 대한 노동으로서의 이해가 없다. 사용자 자본과 노동의 이해 사이를 헤매는 한 사람을 노동자라고 규정해서 단결을 호소해 왔다는 걸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노동자의 법적 정의가 노동자를 노동자로 편제시키지 못한다.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로 편제시켜야 한다. 일제 강점기, 자주독립의 애국과 친일 매국으로 선명해야 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광복절에 기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가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못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소수만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면서 애국했을 뿐, 대다수는 나름대로 이해득실을 따지며 모호하게 주저앉았고 심지어는 친일 매국했다. 대다수에겐 친일 매국과 자주독립 애국 사이의 경계는 수많은 이유를 내세워 변명하거나 노골적으로 모호했다. 대다수는 애국이 아니었다. 그랬으니 조선의 일제 강점이 35년 넘게 계속될 수 있었다. 오늘 자본과 노동의 경계를 두고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친일 매국에 대해 애국이 명확한 것이지만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조선 땅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4. 사실 명확했다면 이 세상은 저 세상이 됐을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아서 이 세상은 계속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의 향상을 위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노동기본권을 노동자의 것으로 보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사용자 자본에 맞서 자유와 권리를 위해 나아가지 못한다고 해서, 현대제철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다수가 직접고용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다고 해서, 그런 우리의 노동현실에 절망하고 주저앉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하기에 이 나라에서,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의 존재 이유가 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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