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트위터에 ‘오늘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laborhell_korea)'이라는 계정이 있다. 날마다 일의 세계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을 기록한다. 지난 7일에만 천안의, 고양의, 태안의, 서로 다른 공사 현장에서 세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 온다. 마주하기 두렵지만, 외면하기 어려운 이 성실하고 서러운 기록을 멈출 수 있는 날이 올까.

계정을 설명하는 문장을 옮겨 둔다. “하루 7명, 일 년에 2천여명이 일하다 죽는 지옥 같은 나라 대한민국. 저들이 만든다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먼지다. 2021년 1월부터 이 계정에 기록된 일 하다 죽은 노동자 : 311명 / 일하다 죽었지만 기사 한 줄 안 나온 노동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날마다 빼곡한 죽음들 사이, 우리들의 기억은 일련의 투쟁이다. 삶이 그렇듯 죽음도, 그에 대한 기록과 기억도 평등하지 못한 이 세계에서, 우리는 주어지는 망각과 끊임없이 다툰다.

1979년 8월11일, 42년 전 오늘에는, 스물한 살의 노동자 김경숙이 목숨을 잃었다. 경숙과 그의 동료들, 187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YH무역의 부당한 폐업에 맞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날 새벽, 농성장인 신민당사 4층 강당 창문 밖에선 자동차 경적이 길게 세 번 울렸다.

'101작전'의 시작이었다. 흰 장갑을 낀 사복요원을 포함한 경찰 1천200여명이 당사 문과 벽을 부수며 들이닥쳤다. 곤봉과 군홧발에 찍히고 밟혀 피투성이가 된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내는데 삼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김경숙은 당사 뒤편의 시멘트 바닥으로 추락한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내 숨을 거뒀다. 경찰과 다수의 언론은 그의 죽음에 대해 과격한 '여공'이 동료들을 선동하다 스스로 동맥을 끊고, 홀로 투신했다 기록했다.

그의 죽음이 국가의 폭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일에 29년이 걸렸다. 2008년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주검에 동맥을 절단한 흔적이 없고, 손등에 쇠파이프로 가격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다. 후두 정부에서는 모서리 진 물체로 가격당한 치명적인 상처가 있다”고 발표하면서, 김경숙의 죽음이 경찰의 과잉 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에 의한 것임을 확인했다.

YH무역을 설립한 장용호는 중국산 모발로 만들어진 가발 수입을 금지한 미국 정부의 조치에서, 가발 생산과 수출업의 기회를 엿봤다. 자본금 100만원, 노동자 10명의 작은 회사로 시작한 YH무역은, 수년 만에 노동자 4천명이 일하고, 수출 규모가 천만달러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회사가 몸집을 키우고, 유신 정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용호가 철탑산업훈장을 몸에 거는 동안, 경숙과 동료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못했다.

가발을 생산하는 현장 노동자 대부분은 농촌의 고향을 떠나 상경한 10~20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하루 12시간이 넘게 일하면서도 월급은 당시 임금 노동자 평균 임금의 절반을 받기도 어려웠다. 하루가 멀다고 고된 철야 작업이 이어졌지만, 연장 수당도 받지 못했다. 한 달에 이틀을 겨우 쉬었고, 고향 친구나 동생을 소개해 직원으로 공장에 들이면 며칠의 휴가가 더 주어졌다.

경숙은 어머니와 남동생의 생계를 위해 열셋부터 일을 시작했다. 여러 하청 봉제 공장을 옮겨 다니며 일을 하다 열아홉 여름, 처음으로 이력서란 것을 쓰고 YH무역에 입사하여, 사원증을 받는다. 명절에 고향에 갈 차비까지를 아껴서 집에 보내고, 밤샘 노동을 이어가면서도 야학에 다니면서 배움을 이어갔다.

회사 사정은 어지러워졌다. 장용호는 자금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무리하게 회사의 몸집을 키우다 위기를 맞았고, 휴업과 해고의 물결이 끝내 폐업에 이르렀다.

‘토론을 하며 싸워야 한다. 개개인을 생각하지 않고 뭉쳐서 인원 감소를 막고 나의 권리와 인격을 찾아야 한다. ... ‘본 공장을 돌려라 고용 완전 찾자.’ 단결. 권리. 뭉침. 싸움. 비평.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1978년 5월2일 김경숙의 일기에서)

경숙은 노동조합의 활동을 시작했고, 42년 전 오늘, 그 새벽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동료들과 함께 투쟁했다.
김경숙과 YH무역 노동조합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유신 체제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을 다시 한번 촉진하는 방아쇠가 됐고, 민주노조 운동의 선연한 역사로, 지금, 여기 싸우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오늘과 연결돼 있다.

'나는 10년 가까이 노동생활을 하면서 가난의 속박과 소외가 얼마나 무섭고 외로운가를 체험했다. 그러다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가 활개를 펴고 당당하게 우리 주장을 하고 노동자 스스로 해결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그동안 우리의 노력은 내 생에 더없이 소중했던 기간이었고 이 소중한 권리를 빼앗긴다면 또다시 이전의 노예적 생활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한다. ... 노동자를 철저히 소외시키는 이 사회에 노동자도 인간으로 살아 외칠 줄 안다는 것을 우리 몸으로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1979년 8월10일 신민당사 농성 중 발언, 고 김경숙 동지 6주기 추도식(1985) 자료)

그의 죽음을, 그의 삶을 다시 적어두고 기억한다. 김경숙을 기억한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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