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우리나라엔 공공기관이 350개쯤 있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공기관운영법)에 따라 공공기관은 시장형·준시장형·기금관리형·위탁집행형·기타 공공기관으로 나뉜다. 공공기관은 공공기관운영법에 따라 해마다 경영평가를 받아야 한다. 공기업 앞을 지나다 보면 경영평가 연속 ‘(최)우수’ 기관 지정이란 환영 플래카드를 볼 수 있다. 공기업 경영평가는 기획재정부 주도하에 꾸려진 경영평가단이 맡는다. 대개 교수와 관련 학자가 경영평가위원으로 들어간다.

공공기관 경영평가단이 2007년 8월 무더위 속에 이화여대에서 공공기관 경영평가 중간발표회를 열었다. 중간발표회는 평가 막바지 때 평가위원과 피평가기관인 공기업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평가 결과를 중간발표하고, 공기업 현장의 애로를 듣고 반영하는 자리다.

이틀간 발표회를 경청한 결과 평가위원 대부분은 ‘공익’보다는 ‘수익’을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의 충실한 집행자였다. 한국전력이나 한국가스공사처럼 현금이 오가는 시장형 공기업이야 수입과 지출 같은 경영지표가 의미 있겠지만, 영상물등급위원회나 국방과학연구소·대외경제정책연구원 같은 기타 공공기관엔 경영 수지가 큰 의미 없다.

기금관리형 공공기관인 국민건강보험공단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건보공단은 그해 독감이 두 번쯤 유행할 걸 예측하고 예산을 짰는데, 독감이 한 번 이하로 유행하면 흑자가 나고, 세 번 이상 유행하면 적자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건보공단이 적자를 많이 냈다고 비판하는 게 의미 있을까. 코로나19로 인한 대량실업으로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근로복지공단이 대규모 적자를 냈는데, 이걸 공단 잘못이라고 다그치면 해결될까.

이런데도 평가위원들은 적자와 흑자라는 숫자 놀음에 빠져 있었다. 당시 내가 본 평가위원들은 모든 걸 계량화하고야 마는 수리 경제학자들처럼 숫자에 매달렸다. 이들이 숫자의 늪에 빠진 사이 공기업의 존재 이유인 ‘공익’은 먼 나라 얘기가 됐다.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국립대병원도 기타 공공기관이라서 공공기관운영법에 따라 경영평가를 받는다. 한 평가위원이 서울대병원을 향해 “왜 수술 건수가 해마다 늘어나지 않느냐”고 짚은 뒤 “외래환자 대기시간이 계속 길어지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의료법상 의료기관은 침상수가 지정돼 있고, 침상수에 따라 의사와 간호사 숫자가 고정돼 있어 다른 공기업처럼 해마다 10%씩 실적 개선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외래환자가 몰리는 것도 정원에 묶인 의료인력이 늘어나지 않는 한 근본적 해결책은 없다”고 답했다. 봉숭아 학당을 보는 듯했다.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원이었던 김현아 전 국민의힘 의원도 당시 공공기관 경영평가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런 사람들이 전문가라는 이름을 빌려 이 나라 부동산 정책을 집행하는 공기업을 평가하고, 사회적 발언을 쏟아 냈으니 부동산 정책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김 전 의원은 2017년 국정감사 때 국토부 산하 공공기관이 빚더미 속에서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며 “언제까지 방만 경영을 계속할 거냐”고 질책한 것도 이런 사고의 연장선이었다. 성과급 잔치를 벌인 건 잘못이지만, 국토부 산하 공기업의 적자는 이를 멈춘다고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전문가라는 사람이 임금만 깎으라고 다그치는 건 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평가위원들이 이런 숫자놀음에 빠진 사이 어떤 공기업에선 친절도를 확인하는 전화 설문조사를 조작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 ‘공익’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숫자만 높으면 만사형통이니까.

집 네 채를 보유한 김 전 의원은 최근 ‘내로남불’이란 비판이 빗발치자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 후보에서 자진사퇴했다. 제대로 검증도 않고 지명한 오세훈 서울시장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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