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벵갈루루라는 도시는 이번 여행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듣도 보도 못했던 곳이었다. 검색을 해 보면 인도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릴 정도로 IT 기업이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고,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라고도 했다. 그러니 인도 여행다운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곳으로 여겨지게 되는 곳이다. 대도시라면 서울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벵갈루루는 그저 기차를 갈아타느라 어쩔 수 없이 반나절을 머무는 장소였을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함피에서 기차로 12시간 남짓 타고 내려와, 이곳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다시 그 정도 시간을 내려가 남부의 중심 도시인 코친으로 가는 길. 벵갈루루에서는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한나절 머무는 곳일 뿐이었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것이 참 오묘하고 매력적인 건 이렇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곳에서 하게 되는 색다른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그건 아마도 의미를 두지 않아서 비워 둔 시간이 많고, 그 비워 둔 시간 속으로 무엇이든 흘러 들어와 속을 채우기 때문이 아닐까?

게으른 도시 함피를 떠나 12시간을 꼬박 내달린 기차는 아침 8시쯤 벵갈루루역에 도착했다. 잠도 덜 깬 채 배낭을 메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기차역의 짐 보관소(Cloak Room). 짐을 맡긴 뒤 기차역을 빠져나와 아침밥 먹을 곳을 찾아 역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문을 연 식당은 별로 눈에 안 띄고 허기를 타고 짜증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할 때 즈음, 딸아이가 호텔 간판과 함께 붙어 있는 식당 간판을 발견한다. 올라가 보니 호텔 손님들이 아침 식사를 하는 뷔페식 식당이었다. 일반 손님도 받는지 몰라 쭈뼛거리고 있으니 매니저로 보이는 이가 나와 반갑게 맞아 준다. 인도 사람들은 이럴 때 참 벽이 없어 좋다. 1인당 200루피(3천600원)에 이용하는 호텔식이라니 나쁘지 않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음식보다 깨끗한 화장실과 세면대이긴 했지만.

아침 햇살이 상쾌하게 비치는 천정 높은 식당에서 커피와 차이까지 풀코스로 끝내고 나니 금세 나른해져 온다. 밤샘 기차 여행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감히 어디 돌아다녀 보자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던 차에 딸아이가 구글 지도에서 식물원이 있는 공원 하나를 찾아 내더니 가 보자고 제안한다. 랄바 보태니컬 가든.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 요금이 3명 합쳐서 50루피란다. 이상하다. 3으로 나눠지지 않는 숫자 아닌가. 3명이라 할인이 들어갔다고 기분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실상은 바가지였겠지만. 어쨌거나 식물원은 좋은 선택이었다. 입장료 20루피(260원)가 좀 아깝기는 했지만 (왜 인도에만 오면 이렇게 쫌팽이가 되는지 미스테리하다.) 그래도 눈앞에 초록초록이 펼쳐지니 기분이 상큼해진다. 입구에서 파는 10루피(180원) 짜리 수박 한 조각을 꼬챙이에 꽂아 들고서 한낮의 뜨거운 인도 태양도 피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버스와 릭샤의 소음에서 벗어나 숲 사이를 걷다 쉴 수 있다는 건 운이 좋은 편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놀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정오밖에 안 됐다. 기차 시간까지는 7시간 정도가 남았으니 좀 더 시간을 때워야 했다. 우리처럼 시간 때우기를 고민했던 선배 여행자들은 MG로드에 있는 스타벅스를 추천했다. 커피값이 아침밥값보다 비싸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제한 와이파이를 쓸 수 있고, 빵빵한 에어컨과 깔끔한 화장실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옵션이 있기 때문이다. 공원을 나와 이번에는 릭샤를 타고 MG로드로 향했다. MG로드는 벵갈루루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라고 했다. 서울의 명동 거리쯤 되는 번화가로 쇼핑몰과 우리에게도 익숙한 패스트푸드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인도에는 곳곳에 MG로드가 있다. 구글 지도에 인도를 가운데 두고 MG로드를 검색하면 열 군데 이상의 MG로드가 검색돼 나올 정도다. 그리고 하나같이 도심의 번화가를 가로지르는 도로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비밀은 바로 MG라는 이름에 있었다. MG로드의 정식 명칭은 마하트라 간디 로드. 다시 말해 ‘간디 선생님 길’ 되겠다. 인도사람들의 간디 사랑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벵갈루루 명동 거리를 살짝 둘러보지만 예상대로 별 감흥이 없다. 번화해질수록 도시는 공장에서 찍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차별성을 잃어 간다. 괜히 더 돌아다녀 봤자 땀만 흘리지 싶어 후다닥 스타벅스로 들어간다. 빵빵한 에어컨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는 바로 그곳으로. 한국과 별 차이 없는 가격으로 음료와 케이크를 사려니 손이 후덜거린다. 푹신한 의자와 빵빵한 와이파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 모든 좀스러움을 이겨 낸다. 동영상을 볼 정도는 아니지만 인터넷 서핑에는 문제가 없는 데다 충전까지 할 수 있으니 여행자들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 아닐 수 없다. 정보를 남겨 준 선배 여행자들에게 축복이.

서너 시간을 그야말로 죽 때리다 해가 뉘엿거릴 즈음 기차역으로 향한다. 저녁거리로 삼을 맥도날드 햄버거 세트를 손에 든 채로. 반나절의 기분 좋은 휴식으로 든든하게 채워진 빈 시간들을 남겨 둔 채 벵갈루루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 다시 또 오게 될 일이 있을까?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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