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어떤 주눅

“우리처럼 공부도 안 했던 사람들이 정규직 되는 것을 바라면 안 되겠죠?” 서해 인근에서 태어나 자라고 일하는 그가 대화를 잇던 중 잠깐 뜸을 들이더니 나즈막하게 물었다. 대도시에서 좀 떨어진 그 지역은 자본주의 냄새가 좀 덜하다. 그 사업장 조합원을 보면 순박한 느낌마저 든다. 그들은 “댁까지 모시겠습니다”며 교통체증에 주차도 어려운 서울까지 데려다주는 친절이 몸에 배어 있다.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그들은 노조를 만들고 노동조건이 개선됐다. 다른 노조들과 교류하며 정규직화를 원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 온 그의 질문이 의외였다. 늘 순박함을 느꼈던 그의 말에서 약간은 주눅 든 느낌이 묻어 나왔다. 정규직이 되려는 소송과 싸움들이 얽히더니 이제는 능력을 따지면서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논란에 영향받은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시험 잘 보는 사람은 가치 있고 시험 잘 못 보는 사람은 가치 없는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소중하기에 그가 하는 노동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차이가 차별이 돼선 안 된다. 어떤 특수계급의 창설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헌법 11조2항이 자꾸 떠오른다. 수저계급, 부동산계급, 특수고용직 등 특수계급을 만들어 낸 우리 사회는 헌법을 위반하는 부조리한 체제가 아닌가.

공동결정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서열은 신이 만든 질서다. 신분제 사회에서 차별은 타고난 운명이다.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사회 서열을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시장의 법칙이 작동한 결과로 여긴다. 시장주의자들은 희소한 물건이 비싸고 흔한 물건이 싼 것처럼 인간도 상품처럼 여겨 서열과 차별을 당연히 여긴다. 운명이나 법칙은 착취를 위한 헛소리고 힘이 결정한다며 계급투쟁을 추구할 수도 있다.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만 측정할 수 없지만, 임금은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여준다. 그중에 매년 논란이 되는 최저임금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잘 알려져 있다. 노동자와 사용자와 공익위원이 모여서 결정한다. 노동자의 수가 훨씬 더 많은데 노사가 9명씩 동수로 참여하는 것이 민주적일까. 최저임금 결정에 참여하는 공익위원은 어떤 근거로 공적이익을 대변하는지를 믿을 수 있을까. 의문이 있지만 어쨌든 최저임금은 공동으로 결정한다.

공동결정에는 여러 가지가 작용한다. 앞에서 말한 운명론·법칙론·계급투쟁론이 상호작용한다. 누구는 기업 실적, 경제성장률, 물가인상률을 따진다. 누군가는 노동자의 생계비를 따진다. 어떤 이는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영세업체 사장의 발언과 언론을 동원한다. 누군가는 최저임금 노동자의 발언과 조합원이 모인 집회를 열고 때로는 최저임금위원회 탈퇴와 불참을 반복하기도 한다.

법정 최저임금 외 다른 임금은 공동결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임금은 흔히 사용자와 노동자의 계약에 따라 결정된다. 사용자가 금액을 제시하고 노동시민은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때문에 노동 값을 사용자가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굉장한 능력이 있다면 임금을 더 비싸게 주는 곳을 고를 수도 있다. 다수 시민은 그럴 처지가 아니다. 그러니 노조를 만들어 노사가 함께 결정한다. 임금이 낮은 작은 직장에서는 이것이 어렵다. 그래서 최저임금 제도가 있다.

평가의 노예

일한 시간에 따라 임금을 더 주는 시간급제, 기여도를 고려한 연공급제, 성과를 중시한 성과연봉제, 일 처리량에 따른 도급제, 숙련도를 중시한 숙련급, 일의 성격에 따른 직무급제 등 노동을 평가하는 여러 방식이 있다. 이런 현실에서 다양한 산업과 기업의 조건을 무시한 단일 임금제도를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위험할지 모른다.

고정불변의 평가기준은 없다. 그랬다면 천대받던 광대와 다를 바 없는 아이돌은 노래하고 춤이나 춘다고 욕먹었을 것이다. 노동을 평가하는 기준이 변하지 않았다면 일은 안 하고 공이나 차는 손흥민은 고액연봉 스타가 될 수 없었다. 공 때리는 김연경은 세계 최고연봉 배구선수가 아니라 부엌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녀자로 남았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서 맨날 게임이나 해 대는 프로게이머들은 굶어 죽었을 것이고, 자기 사진이나 찍어서 올리는 인플루언서들은 외면당했을 것이다.

사회 없이 스타 없다. 사회 없이 엘리트도 없다. 때문에 잘나간다고 으스대기 전에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 공부 잘한 엘리트들은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고 그 능력을 인정해 주는 사회에 감사하며 공헌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논란에서 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감사와 공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야말로 경쟁주의적 평가에 사로잡힌 노예가 아닐까.

자기관과 노동관

평가에 억눌린 사람들에게 도덕과 양심만을 기대할 수 없다. 으스대거나 주눅 들지 않고 나와 너의 존엄과 내 노동과 네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기 위한 과정을 만드는 실천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각종 이데올로기와 제도들에 의해 변형되고 뒤틀린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출발이라는 것을 노동현장의 사례들을 통해 알게 됐다.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 경쟁하면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노동에 대해서도 유사한 태도를 가진다. 내가 하는 노동은 고귀하지만 네가 하는 노동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내가 많이 받아야 하고, 너희는 조금만 받으라는 식이다.

열등감이 큰 사람들은 자기 노동을, 내가 하는 노동은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고 별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임금을 적게 받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다. 능력을 가진 그들이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열등감은 우월감의 다른 이름이다. 조건이 바뀌면 나도 남보다 많이 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한다. 무권리 상태이다가 노조를 만들면 자기주장을 할 공간이 열린다. 이런 틈을 타 과도한 욕망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내가 소중하다면 내 노동도 소중하다. 소중한 만큼 적절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설혹 내가 공부 잘하고 시험에 합격했지만, 남들의 노동도 소중하기에 모두가 적절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충만하다면 시험이라는 평가나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는 강요된 경로를 벗어나 다르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의 자존감이 높아질 때 노동존중 사회와 적정임금 체제가 가능할 것이다.

자기관(자신을 보는 시각)과 노동관(노동에 대한 시각)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론을 통해 각종 주장들이 나오고 노동계에서도 각종 이론을 근거로 노동교육을 한다. 그러나 분노에 앞서 자존감을 일깨우는 것이 매우 소중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정책이 있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이 일그러진 상태라면 그것들은 변형되고 뒤틀린다. 그 많은 이론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닿지 않는다면.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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