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2020년 4월29일,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화재참사로 38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런데 이 죽음에 책임이 있는 발주처 한익스프레스 관계자는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결로를 막겠다고 대피로를 폐쇄하고, 화재에 취약한 우레탄폼을 사용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발주처가 안전조치 의무를 감리회사로 넘겼고, 고의범이 아닌 과실범으로서 일부 피해자 유가족과 합의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을 확산하는 계기가 됐던 한익스프레스 화재 참사의 실질적인 책임자들은 이렇게 빠져나갔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2008년, 40명이 사망한 코리아2000 냉동창고 화재 참사가 있었다. 냉동창고 건설현장에서 노동자의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심각한 참사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런데도 이윤을 먼저 생각해 결국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이 어떻게 과실범일 수 있는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은 산재와 시민재해는 기업의 과실이 아니라 조직적 범죄이며,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원청의 경영책임자가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에 책임을 지게 해야 죽음을 멈출 수 있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법이다.

아직 시행이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노동자와 시민들의 요구로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졌는데도 이런 판결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국회와 정부·기업·사법부가 이전의 관행과 인식에 계속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국회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법을 계속 축소하고 후퇴시켰다. 한익스프레스 같은 발주처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책임을 빼 버렸고, 인허가를 담당하는 공무원의 책임도 뺐다. 5명 미만 사업장은 법에서도 제외되도록 만들었다. 최근 광주에서 발생한 철거건물 붕괴사고로 시민들이 희생됐지만 그 책임자도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빠져나갔다.

그런데 정부의 시행령 입법예고안을 보니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 또 좁혀지고 있다. 입법예고안은 직업성 질병을 급성중독으로 한정한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직업성 암에 걸려도 노동자가 죽으면 이 법이 적용되지만, 평생 식물인간처럼 살면 이 법을 적용하지 않겠다고 한다. 위험요인을 점검하고 개선해야 하는 화학물질 취급사업장의 적용 법령도 한정했다. 시민재해를 예방해야 하는 공중이용시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니 시행령에서 정하라고 했더니 판교 붕괴 참사가 발생한 공연시설도 제외되고, 다중이용시설도 2%만 해당하도록 좁혀 놓았다.

더 심각한 것은 경영책임자의 의무를 축소하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책임자가 ‘재해예방대책’을 마련할 의무를 명시했다. 경영책임자가 노동자의 안전을 지키는 인력과 예산의 최종 결재권자이기 때문이다. 구의역 김군, 태안화력 김용균, 평택항 이선호 같은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위험작업이 2인1조로 이뤄지도록 인력과 예산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시행령 입법예고안에는 이 의무가 축소돼 설령 위험작업에 2인1조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인력이 확보되지 않았어도, 안전관리 인력만 있으면 경영책임자가 의무를 위반한 것이 아니게 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에 관한 법령을 위반하지 않도록 관리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한다. ‘안전보건에 관한 법령’은 산업안전보건법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CJ E&M 이한빛의 죽음, 택배노동자의 죽음 등 일터 괴롭힘에 의한 죽음과 과로사를 방지하려면 근로기준법이 안전보건에 관한 법령에 포함돼야 한다. 그런데 시행령 입법예고안은 근로기준법을 포함하는지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 게다가 법령 이행에 대한 점검을 민간에 위탁할 수 있게 만들어서, 원청이 시키는 대로 하는 민간위탁 기관이 ‘문제없다’고 보고만 하면 경영책임자가 면책될 수 있게 만들었다.

법 하나 만든다고 노동자와 시민이 안전한 사회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와 시민의 죽음을 막아 보려는 무수한 노력이 정부와 법원과 국회의 태만, 그리고 기업의 노골적 방해로 멈춰 있는 현실이 괴롭다. 그래도 우리는 변화를 시작했다고 믿는다. 아직은 사람의 생명보다 기업의 이윤, 경영책임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그래도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동참했던 노동자와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치지 말고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입법예고안이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게 또다시 목소리를 내 보자.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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