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최근 자유민주주의가 논란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때문이다. 그의 출마선언문은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윤석열 개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호감이 없다.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다만 그가 던진 쟁점, 자유민주주의로 본 현 집권세력 모순은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민주주의의 제약 조건으로 자유를 강조한 건 근대 사상의 핵심 중 하나였다. 몽테스키외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여론에서 독립적인 사법부를 강조했다. 여론으로 법의 판결까지 좌지우지된다면 법 자체가 권위를 가질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법이 권위를 잃으면 다수의 이름으로 다수의 자유를 제약하는 대중의 폭정이 이뤄질 수 있다. ‘다수의 전제정’(Tyranny of the majority)이란 유명한 말을 남긴 토크빌은 다수가 소수의 자유를 억압하는 민주주의를 염려했다. 그는 대안으로 무한한 정치적 자유, 언론의 자유를 제시했다. 자유를 통해 다수 시민의 지적 윤리적 능력이 성숙해야만 문민 독재를 방지할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대중 민주주의가 여론이란 부드러운 억압 도구를 키운다는 점에 주목했다. 여론은 대중의 생각을 획일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 여론은 소수의 이데올로그가 만들어 내는데, 교육받지 못한 시민들은 무방비로 지배당하고, 중산층은 체면을 위해 다수에 휩쓸려 간다. 밀은 여론의 독재를 막기 위해 국가 또는 사회가 개인을 강압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지배적 여론과 다른 의결들이 철두철미하게 보호받아야 한다. 사회는 도덕적·온정적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다원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요체다.

민주주의가 가진 결함을 자유로 보완해야 한다는 자유민주주의 계보에서 보면, 현 집권세력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준사법기관인 검찰을 집권세력의 이익에 따라 통제하고, 대통령의 사법적 권한을 키운 건 몽테스키외가 봤으면 기겁할 일이었을 것이다. 토크빌과 밀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 논쟁까지 봉쇄하는 역사왜곡특별법, 대통령 열성 지지자들의 여론몰이,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반대 세력을 상대로 한 낙인찍기 등은 부드러운 독재와 다르지 않다.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의 결함을 현 집권세력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자유민주주의는 20세기에 들어 반공주의와 결합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쪽 진영이 체제 경쟁에 돌입한 탓이다. 우선 그 선봉에 선 건 케인스주의였다. 케인스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을 예방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의 결함을 보완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정부가 자본가의 무기력을 보완하기 위해 직접 투자에 나서고, 노동자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완전고용 정책을 펴야 한다. 케인스주의는 미국에서 안정적 거대 법인기업의 등장으로, 서유럽에서는 계급 타협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모델로 구현됐다.

그런데 이런 케인스주의가 1970년대부터 위기에 빠진다. 이윤율 하락이란 자본주의의 치명적 결함이 발목을 잡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바로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자본가의 무기력을 정부 투자 대신 금융 주도의 세계화로 보완했고, 노동자의 불만은 완전고용 대신 실업 관리로 보완했다. 계급 전쟁의 방지는 계급 타협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본진을 무력화하는 노조의 포섭(정규직)과 배제(비정규직) 전략으로 대체했다. 신보수주의의 이데올로그라 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등은 자유민주주의를 존 스튜어트 밀이 강조했던 시민의 지적 윤리적 성숙에서 떼어냈다. 이들은 시장이 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놨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중반 개발도상국에서 반공적 자유민주주의는 케인스주의가 아니라 로스토(Rostow)가 주장한 ‘선의의 독재자’로 시작했다. 그는 민도가 낮고 자본이 없는 개발도상국에서는 선진국 같은 자유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고 봤다. 1950년대 한국 수준의 나라에서 미국 같은 민주주의를 하는 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축적 없는 소비” 속에서 몰락하는 길이다. 국민의 지적 윤리적 수준을 높이는 동안에는 독재가 불가피하며, 이 독재는 반공적이면서 엘리트 공급이 충분한 “선의”를 가진 군부가 맡아야 한다.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는 민도와 자본의 축적이라는 도약(take-off) 이후 이뤄질 수 있다. 로스토 경제성장론의 쇼케이스는 바로 1960년대 박정희였다. 참고로 한국에서 아직도 자유민주주의가 반공 독재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는 건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다.

20세기 후반에 만개한 신자유주의는 묘하게도 개발도상국에서 민주화로 나타났다. 칠레·대만·한국 등에서 1990년대 일제히 독재가 종식됐는데 민중의 투쟁이 큰 역할을 했지만, 변화한 세계 질서도 중요한 배경이었다. 냉전이 해체된 가운데 로스토의 도약을 끝낸 나라들이 하이에크가 말한 시장에서 준비된 개인을 앞세워 독재를 끝낸 것이다. 그리고 문민정부들의 과제는 21세기적 자유민주주의의, 즉 신자유주의 개혁이었다. 따져 보면 한국의 김영삼·김대중 정부가 말했던 자유민주주의는 사실 신자유주의와 의미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도 자유민주주의를 끝내 구원하지 못했다는 건 21세기에 만개한 포퓰리즘을 통해서 증명된다. 신자유주의의 선구자인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증명했듯 자유를 대중 스스로 포기하는 타락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촛불혁명’ 정부를 자처한 현 정부에서 조국 사태로 상징되는 위선을 비롯해 세대 갈등, 노노 갈등 등이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커지고 있다. 집권여당은 이런 갈등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다수당을 차지했다. 대중의 정념을 동원하는 포퓰리즘 정치는 법치의 훼손, 여론의 지배 등을 특징으로 한다. 앞서 본 고전적 자유민주주의 주창자들이 염려했던 바로 그것이다.

윤 전 총장은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를 지적했다. 중요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가 300년에 걸친 자유의 우여곡절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프리드먼을 좋아한다고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프리드먼의 최종 도착지에는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반공 독재로 해석해 거품을 무는 진보진영 일부가 옳다는 건 아니다. 이들은 더 안타깝다. 포퓰리즘이 왜 문제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 이 칼럼은 본지 의견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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