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방준표(1906~19954).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사학) 제공
▲ 방준표(1906~19954).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사학) 제공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통영의 청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청년운동·노동운동과 이에 기초한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네 차례 투옥된 바 있고, 해방 후 1945년 11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대회에 철도노조 서울 대표로 참석한 노동운동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1946년 9월 총파업과 연이은 10월 인민항쟁을 주도한 활동가들 가운데 1인으로 한국전쟁 때는 전북도당 위원장이자 전북유격대 사령관이었던 방준표다.

가난한 집안의 수재

방준표(方俊杓)는 1906년 4월28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346번지에서 아버지 방한정과 어머니 공재복 사이의 9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닷가 통영의 해산물가게 사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박봉에 ‘술 잘 먹는 사람’으로 통했으니 어려운 생계를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돌보는 상황이었다고 전해진다.

통영에서 서당 3년, 보통학교 6년을 다닌 방준표는 17세 때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유학했다. 당시 가난한 수재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가는 경성사범학교에 합격한 것이다. 경성사범은 일제가 1922년 설립한 최초의 관립 사범학교로서 전액 학비면제에 매월 생활비까지 주고 보통학교 교사 또는 교육 관료로 취업을 보장했다. 일제는 식민지 초등교육을 위해 1922년 입학정원 102명 가운데 92명을 일본인으로 채우고 조선인 응시자 221명 중 겨우 10명만 뽑았다.

방준표는 1928년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방 하나에 12명의 학생을 수용했는데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따랐을 뿐 아니라, 극심한 민족 차별대우를 겪었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 “전부 일본인 학생이었고 조선인 학생은 1할 정도밖에 안 됐다” “나는 여기서 놈들의 민족 차별대우에, 특히 민족적 자각과 일제에 대한 증오를 느꼈다”고 적었다.

똑똑한 식민지 청년학생의 이러한 생활체험 이전에 이미 독립운동에 뛰어든 친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방준표보다 8년 연상인 친형 방정표(方正杓)는 1919년 통영 3·1 운동과 그해 7월 통영청년단 창립에 참여했고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사상단체 정화회(正火會)의 기관지 <횃불> 편집인으로 활동하다가 사상범으로 재판까지 받은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형의 영향, 차별체험, 사상학습 통해 혁명가로

3·1 운동을 계기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세례가 급속히 확산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당시 지식인 대다수가 그랬듯이, 방준표 역시 마르크스-레닌주의 관련 서적들을 집중적으로 탐독했을 것이다. 민족적 양심을 갖고 계급적 자각에 눈뜬 똑똑한 사람들 치고 억압과 착취와 수탈이 없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이념,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에 젖지 않은 이는 없었다.

그는 또한 당시 유행하던 청년학생들의 농촌 돕기 및 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짐작된다. 매년 여름과 겨울 방학 때는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가 지냈으며, 서울 유학 4년이 되던 1925년 대홍수 때는 통영 수해 구제활동에 참여해 간부 13인 중의 한 사람이자 재외유학생학우회 대표 자격으로 통영 일대를 순회하며 모금 활동을 전개한 바 있기 때문이다.

1928년 경성사범을 졸업한 방준표는 부산 영주동의 어느 보통학교에서 1년간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과의 마찰이 잦아지고 호흡기질환이 악화돼 사표를 냈다.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1929년 4월부터 10월까지 치료에 전념했다. 건강이 좀 회복된 그는 그해 8월 지역 대중운동의 중심단체였던 통영청년단 위원장을 맡으면서 직업적 혁명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통영청년단 위원장으로 네 번 투옥

그러나 그때부터 험난한 삶이 시작됐다. 1929년 10월9일 통영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가택 압수수색을 당했고 10월21일 체포됐다. 악명 높은 동래경찰서 고등계 노덕술이 지휘하는 수사망에 걸려 부산까지 압송됐다. 동래청년동맹과 통영청년동맹의 간부들이 비밀결사 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2명이 검사국에 송치되고 부산형무소에 갇혀 검찰조사를 받다가 11월6일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방준표는 1930년 8월1일 경찰에 또 체포됐다. 청년동맹회관에서 통영학생회 정기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흑판에 ‘오늘은 적색 데이’라는 메모를 적어 놓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1932년 4월26일 반일 격문으로 방준표 등 통영 사회운동 주요인사 15명이 체포됐다. 취조 20여일 만에 3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됐는데, 방준표는 끝까지 버텨 다행히 빠졌다. 그러나 그해 12월13일 방준표를 비롯한 통영 노동조합 간부 3명, 소비조합 간부 4명이 또 검거됐다.

그 후 출감한 방준표는 일본으로 건너가 얼마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동경에서 일본말로 ‘노가다’로 불리는 토목노동을 하면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일본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934년 조선 사람은 조선에서 일해야겠다는 것을 느끼고 조선으로 나와 고향을 거쳐 서울에 왔다. 인쇄 직공 견습부터 시작해 6년 동안 기계공 노릇을 하면서 조선인쇄주식회사·서적회사·곡강인쇄소·영등포 기린맥주공장·용산철도공장 노동자 속에 공산주의 그룹 조직 활동을 했다”.

서울의 노동자 밀집 지대였던 영등포와 용산에서 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에 헌신하고 있던 그의 나이 35세 때인 1940년, 또 폐디스토마에 걸려 심한 각혈로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가 1940년 4월부터 1942년 3월까지 근 2년을 앓아누웠다. 하지만 11년 연하의 아내 김정과 세 아이의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영의 정미소, 밀양의 인쇄소와 밀양의원 등에서 사무원이나 직공으로 취직한 까닭이다.

노동자 밀집지대, 영등포·용산의 노동운동

1945년 8월15일 방준표는 경남 밀양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그는 8월17일 곧바로 상경해 서울지역 노동운동에 복귀하고 1천500여명의 용산철도공장 등 철도노동자의 의식화·조직화에 집중했다. 동시에 그해 10월15일 조선공산당 용산·마포 지구당에 입당해 상임 간부로 활동했다.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이 한반도의 신탁통치(후견) 문제 등을 논의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에 따라 1946년 1월23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회됐다. 이날 서울시 인민위원회 주최로 10만명 이상의 대규모 ‘미소대표 환영 시민대회’와 시가행진이 진행됐는데, 반탁전국학생연맹 300여명의 습격을 받았다. 이에 철도노동자를 동원해 반탁 극우들에 맞서다가 방준표는 미 군정에 체포·구속됐다.

그러나 해방 후 그의 첫 투옥은 오래가지 않았다. 투옥된 사상범들과 함께 그해 4월18일 석방됐다. 미소공동위원회가 4월17일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지지 서명하는 정당과 단체는 모두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한다는 내용에 합의해 정세가 일시 호전됐기 때문이다. 방준표는 투쟁현장으로 달려가 서울 철도구 당부로 옮겨 상임위원을 맡았다. 서울 전역의 철도노동자 사업을 총괄하는 책임과 권한을 가지게 됐다. 1946년 5·1절에는 ‘철도노동자 투쟁 열성자’로 표창장을 받았다.

9월 총파업의 발파공

1946년 8월 방준표는 부산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경남도당 상임위원이자 노동부장을 맡았다. 그의 임무는 ‘철도노동자들 사이의 당 조직 견고화’ ‘반당 분자와의 투쟁’이었다. 1946년 9월23일 부산지역 철도노동자 7천여 명의 파업으로 발화된 9월 총파업과 연이은 10월 인민항쟁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동시에 공산당·인민당·신민당의 남조선노동당 통합 과정에서 분파주의적 흐름을 억제하는 소임을 맡았을 것이다.

9월 총파업은 10월1일 대구 경찰의 발포를 계기로 전국적 민중봉기로 확산됐다. 이 과정에 방준표는 해방 후 두 번째로 구속됐다. 10월7일 체포된 그는 ‘야수적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3년 징역형이 선고됐으나 이듬해 1947년 7월14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옥했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과 평양의 본회의에서 진전을 보이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돼 미 군정이 정치범 석방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47년 12월 방준표는 모스크바 당간부학교(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 대상자로 선정돼 3·8선을 넘어 월북했다. 1948년 2월1일부터 8월1일까지 평양의 러시아어 예비과정을 마치고 그해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 모스크바 당간부학교에서 수학했다. 한국전쟁 시기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 등과 함께 공부했다. 하지만 방준표는 모스크바에서도 폐질환으로 장기 결석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역을 치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 해방 지역에 합법적으로 조선노동당 지역당이 건설될 때 방준표는 전북도당 위원장으로 일했고 인민군 후퇴 때 전북도당을 수습해 회문산으로 들어가 전북유격대를 이끌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휴전이 논의되던 1951년 7월 초 이현상 독립 4지대(남부군) 사령관과 방준표 전북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남도당 위원장 등 남쪽 6개 도당 지도자들이 긴급 회동한 덕유산 송치골 논쟁은 유명하다.

덕유산 송치골 논쟁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면 투쟁을 가일층 강화해야 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부대를 대단위로 재편할 필요가 있소.”(이현상 사령관)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전선이 소강상태로 돌아서면 대규모 토벌대를 편성할 것이오. 그에 대비하려면 부대를 소규모로 전환할 필요가 있소. 인민들 속으로 침투해서 장기투쟁을 꾀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오.”(방준표·박영발)

대대적인 남부군 토벌 작전으로 지리산뿐만이 아니라 회문산·백운산·운장산·내장산·덕유산 등지의 유격대가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방준표는 1954년 1월 덕유산에서 토벌대의 기습을 받고 생포 직전 수류탄으로 자결했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이현상·박영발과 함께 가묘가 조성돼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