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별수는 없다. 그저 깨어나고 잠에 든다. 어김없이 밝아 온 날, 새롭고도 낡은 숫자들이 쏟아진다. 해를 넘긴 감염병 확진자수, 오르고 내리는 주가들, 기업들의 실적 전망, 차기 대선 주자들의 지지율, 수조 단위의 새로운 투자들, 억단위로 갱신되는 아파트 매매가, 달마다 기록을 갈아 치우는 실업급여 지급액, 시급 기준 440원이 오른 지난 밤 결정된 내년도 최저임금액.

숱한 숫자들을 더듬어 살아간다. 숫자들 너머의 삶과 노동을 가늠하려 다투지만 어렵고 두렵다. 밝아온 오늘, 깨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숱한 숫자들이 이루는 평균값에도 중윗값과도 닿지 않는 수많은 이들의 일과 삶을 우리는 어떻게 가늠하고 있을까.

숱한 숫자들이 이루는 지표와 평가와 등급들은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객관화하고 있을까.

지난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무역개발이사회에서 한국의 회원국 지위를 개발도상국(그룹 A)에서 선진국(그룹 B)으로 변경하는 안이 가결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라는 점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라며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또 “국민들도 피와 땀으로 이룬 자랑스러운 성과라는 자부심을 가져 달라” 말했다.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선진국으로 국제인증을 받은 7월2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 만세다”라고 적었다.

대통령도, 정권의 공격수도 자랑스러워하는 이 ‘선진국’ 인증의 바탕이 된 생산 규모 세계 10위 한국 사회의 경제지표들은 일하는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의 다른 모양이다.

지난 8일 한국노총에 따르면, 국제노총(ITUC)이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노동권 지수(Global Rights Index)’에서 한국은 올해도 5등급을 받았다. 전 세계 150여개 나라의 노동기본권 현실을 90여개 지표를 기준으로 분석하는 이 노동권 지수는 1등급부터 5+ 등급까지 6단계로 이뤄져 있다. 이 중 5+ 등급은 전쟁 등으로 사실상 정부의 기능이 마비돼 법치가 작동하지 않아 유의미한 평가 자체가 어려운 나라들이다.

따라서 한국에게 부여한 5등급이 사실상 가장 낮은 등급으로, 이는 ‘법과 제도에서 노동(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를 의미한다.

국제노총이 글로벌 노동권 지수를 처음 발표한 2014년 이래, 한국은 줄곧 5등급에 머물러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한 38개국 중, 올해 5등급으로 분류되는 국가는 한국과 터키, 콜롬비아 세 나라뿐이다.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 관련 흐름이 평가에 반영되는 내년에는 등급 상향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존재하지만, 헌법에 명시된 노동 3권에 제한이 여전히 여럿 존재하는 노동관계법령 개정안들을 살펴보면, 당분간 ‘선진국’ 한국의 노동권 지수는 최하위 ‘5등급’ 자리를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자랑은 손쉽고, 반성은 찾기 어렵다.

서로 다른 이해의 숫자와 지표, 등급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주목해야 할까.

‘선진국’ 한국이라는 손쉬운 자랑 앞에, 일과 삶의 현장에서 반복하는 인간존엄 훼손을 감당하며 자신을 갈아넣어 이 세계를 지탱하는 노동자의 현실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 먼저 놓여야 하는 것 아닌가.

인간과 사회의 조건과 현실을 적확하게 객관화하고, 인간의 존엄을 향하는 일과 삶의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기초로서, 날마다의, 달마다의, 해마다의 숫자들을 다시 살펴야 한다.

주어진 지표들 너머의 삶을 다시 읽어야 한다. 일과 삶의 현실이 담긴 우리의 지표들, 우리 노동과 우리 노동운동의 지표들을 새롭게 설계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다시 숫자들을 더듬는다. 별수는 없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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