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인도 남부는 북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인도로 통합되기 이전, 북부의 왕국들과는 전혀 다른 왕국이 들어섰던 곳이라 그런 면도 있고,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기 전에 오랫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곳이 많은 탓도 있다. 그래서 남부 쪽으로 오면 성당 건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금 가 볼 고아 역시 꽤 포르투갈 식민지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도시다. 역사는 역사일 뿐이다. 지금의 고아는 그런 역사는 한겹 아래 묻어둔 채 인도양을 바라보며 끝도 없이 남북으로 펼쳐진 멋진 해변과 황홀한 일몰을 안고 있다. 특히 유럽의 히피 여행자들에게는 아주 오래전부터 해변과 파티와 게으름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휴양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뭄바이에서 시작된 인도 남부여행. 뭄바이에서 고아로 가는 전통적인 방법은 역시 기차다. 기차로 가려면 12시간은 족히 걸린다. 600킬로미터 가까운 길이라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12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갈아타고 온 우리로서는 여행 시작부터 피곤에 쩔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인도 저가 항공으로 휭하니 날아가는 하늘길이었다. 하늘길에도 이제는 고가와 저가가 나뉘어져 우리 같은 빠듯한 여행자들에게도 길 한쪽을 내어 줄 수 있게 됐다. 비행기로는 딸랑 한 시간. 12시간 대 1시간이라는 강력한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수많은 탄소 발자국을 하늘에 남기며 고아로 날아간다.

국제공항에 내리니 아침 7시도 채 안 된 시각.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콜바 비치까지는 택시로 30~40분을 더 가야 한다. 고아는 파나지라는 도심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다. 휴양지 ‘고아’의 이름을 먼저 알린 곳은 안주나 비치, 아람볼 비치 같은 북쪽의 해변이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카페와 숙소들에는 언제나 젊은 여행자들로 넘쳐 났다. 그런 복잡거림을 피하고 싶은 배낭족들이 흘러 내려오면서 우리가 가려고 하는 콜바 비치를 비롯한 남쪽의 해변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곳도 아직 북쪽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북적거리는 동네로 변해 가고 있었다. 아직인 만큼 적당히 한가로웠고, 물가도 아직은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아침 7시30분. 아직 방 준비가 안 됐다는 얘기에 반쯤 내려온 눈꺼풀을 다시 잡아 올리며 아침 허기나 해결하자며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꼭두새벽을 갓 지난 이런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을 찾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한국처럼 24시간 해장국집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동네를 한 바퀴 돌아봤지만 문을 연 곳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도 때울 겸 해변으로 나가 인증샷 몇 장을 찍어 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날 선 위장의 허기뿐. 다시 식당가로 발길을 돌려 보지만 여전히 허탕이다. 허기에 이성이 저 세상으로 가 버리기 직전, 호텔을 겸한 식당을 발견하고 홀린 듯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 선택은 최악의 맛으로 돌아왔다. 어디서 먹어도 맛없기 힘들다는 짜이를 이렇게 맛없게 만들 수도 있구나 싶어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해변의 습기를 다 먹은 듯 눅눅해진 토스트는 그저 입으로 구겨 넣어 위장의 빈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똥구멍으로 먹어도 이보다 맛없기는 힘들 그런 아침을 뱃속에 우겨 넣고 호텔로 향했다. 방이 나오려면 아직도 시간이 남았다. 도저히 움직일 기운이 없어 호텔 프런트 소파에서 쭈그리고 자기를 한 시간, 드디어 방이 나왔다. 짐을 풀자마자 첫 번째로 한 일은 라면 끓이기. 위장을 차지하고 있는 똥맛 짜이와 곰팡내 나는 토스트를 희석시키기에 라면 국물 만한 게 어디 있으랴. 허겁지겁 한 냄비 해치우고, 격한 트림을 토해 내고서는 곧바로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이대로 하루가 끝나 버렸다면 고아와 콜바 비치는 최악의 여행지로 기억됐겠지만, 여행의 맛은 역시 마지막 반전에 있었다. 시체처럼 몇 시간을 보낸 뒤, 해가 뉘엿거리는 바닷가로 나갔다. 아직 정신이 다 들지 않아서인지 해변 식당에서 나온 젊은 삐끼님의 권유에 의심 없이 넘어갔다. 모래사장 바로 앞 식당에 자리를 잡고, 라씨와 맥주, 감자튀김을 시킨다. 맛은 역시 저 세상 맛이다. 하지만 콜바 비치의 진짜 안주는 테이블 위에 있지 않았다. 눈앞에 인도양의 붉은 석양이라는 제대로 된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태양이 서쪽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해변은 점점 더 비현실적인 색감으로 변해 갔다. 그냥 붉다고 하기 힘든, 뭔가 걸쭉하고 두터운 붉은색. 그 붉은빛을 받아 바다는 출렁이기보다는 끈적이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왠지 모르지만 인도양이라는 이름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바다빛을 등에 지고 모래 위에 작대기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꼬맹이.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르는 패러슈트에 위태롭게 매달린 청년. 청년을 매단 채 저무는 태양 속으로 치달려 나아가는 보트. 보고 있을수록 현실감이 없어지고 나른해지는 이 모든 풍경들. 그 속으로 끝도 없이 빠져든다. 이 몽롱함을 위해 24시간을 날고 달려 왔으니, 더 몽롱해져 볼 일이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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