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우리 언론은 지난달 25일에도 한국전쟁 발발 71주년을 맞아 기념기사를 쏟아 냈다. 서울신문은 8면에 서울시가 서울도서관 외벽에 내건 참전용사 이름을 새긴 현수막을 찍은 사진을 실었다. 한겨레는 13면에 국립서울현충원 장병 묘역에서 자원봉사하는 학생군사훈련단(ROTC) 대학생 사진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10면에 한국전쟁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96살의 참전 미군을 화상 인터뷰했다. 참 한결같다. 이념의 노예이거나 ‘국뽕’에 취한 한국전쟁 보도는 어떤 감흥도 없이 타성에 젖었다.

동아일보와 한국일보는 좀 색다른 전쟁 이야기를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25일자 1면과 2면에 ‘좌우 나뉘어 서로 할퀸 상처는 국가가 저지른 죄 … 사과받고 싶어’라는 제목으로 민간인 피해자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한국일보는 25일자 6면에 ‘국가가 외면한 6·25 한국군 위안부 … 서울·강릉에만 128명’이란 제목으로 한국전쟁 위안부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귀옥 한성대 교수를 인터뷰했다. 한국전쟁 위안부는 군의 공식자료와 많은 참전 장교들의 증언도 있었지만 정부는 아직도 이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다. 김 교수가 2002년 논문으로 이를 세상에 알리자 국방부는 연구 자제를 요구하는 등 외압을 가했단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일이다.

한국전쟁 직후 입대해 통역장교로 무려 7년을 복무한 언론인 고 이영희 선생의 자서전에도 한국군 위안부 얘기는 두 번이나 등장한다. 당시 이영희 선생이 소속된 11사단은 지리산 공비 토벌을 마치고, 1951년엔 동해안 전선 후방 산악지대 토벌작전에 투입됐다. 북쪽으로 탈출하는 인민군의 퇴로를 봉쇄하는 일이었다. 부대가 주둔한 양양군 낙산사 인근에 자연 굴을 파서 만든 방공호 3개가 있었다.

이영희 선생은 자서전에 “설악산 소탕작전에서 교대하고 휴식하는 사병을 위해 굴속 후방에서 여자를 데려다 놓고 사병들의 동물적 욕구를 해소케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한 사병이 오래간만에 부드러운 살침대를 즐기려고 굴속에 들어가 만리장성을 쌓으며 이야기를 해 보니 바로 자기 고향 마을에서 흘러온 아가씨였다. 눈물에 젖은 두 남녀는 재회를 약속하고 굴 문을 나왔다”고 했다. 김귀옥 교수가 밝힌 강원도 앙양의 위안소와 일치한다.

이영희 선생 자서전엔 이런 기록도 있다. “1년반 게릴라 소탕전을 마친 우리 연대는 1951년 겨울 처음 정규전에 투입됐다. ‘그린백’(화폐로 통용되던 군용 수표)이라는 신묘한 부적만 몇 장 드러내 보이면 등불에 나방이 찾아들듯 이 땅의 여성들이 알몸으로 모여들었다.” 이영희 선생은 이들이 자의로 성매매하러 온 것처럼 묘사했지만, 김귀옥 교수는 정부와 군대가 여성을 전쟁에 성노예로 동원했다고 주장한다. 강제 동원의 정황이 너무도 뚜렷하다는 것이다.

통역장교였던 이영희 선생은 한 미군 장교와 얽힌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전쟁 중의 한국은 후방 근무 미군들에게는 에덴동산이었다. 52년 늦가을 신임 고문관 메이슨 소령이 부임했다. 메이슨 소령은 한국군 장교에게 15달러를 주면서 자기를 위해 여자 하나를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여자 둘을 싣고 오다가 헌병에게 들켰다. 메이슨은 내가 빼돌렸다고 여겨 주먹질을 했다.”(<역정>, 이영희, 1988)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남북한에 두 개의 정권을 만들고 제 나라 국민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한국전쟁은 인민해방전쟁도, 자유수호전쟁도 아니다. 못난 사내들의 욕심이 일으킨 더러운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건 어린이와 여성이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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