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장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암이란 ‘선고받았다’고 표현하는 두려운 병이었다. 의학의 발달로 암 생존율이 높아졌지만, 암은 여전히 환자의 건강, 가족의 생계에 큰 타격을 주는 두려운 존재다. 암 환자는 병의 원인을 수없이 자문하곤 한다. 하지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원인불명도 많은 암 예방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비교적 원인을 찾기가 수월한 것이 직업성 암이다. 국제암연구소가 정한 1군 발암물질 120종 중 70종을 작업장 노출에서 찾아냈을 정도로 직업은 암 예방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이에 따라 직업성 암은 국민 암 예방 사업의 중요한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직업성 암 관련 대표적인 정책은 산재보상이며, 2018년 산재보험으로 인정된 직업성 암은 205명이었다. 산재보험에 의한 보상 건수를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는 10만명당 직업성 암 보상건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독일 15.1명, 프랑스 11.4명, 핀란드 3.71명에 비해 우리는 0.74명 수준이다.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암까지 포함한다면 직업에 기인한 암은 더욱 많을 것이다. 1981년 돌(Doll)과 페토(Peto)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 인구 암의 약 4%가 직업에 기인한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매년 신규 암 환자의 4% 정도를 직업성 암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우리나라의 2018년 신규 암 환자 24만4천여명에 대입하면, 9천753명에게서 직업성 암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산재보험으로 인정된 205명과 비교하면, 전체 추정 암의 2.1%만이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흔히 직업성 암 인정 비율이 낮은 이유로 직업병 인정기준의 엄격함, 인정 절차의 복잡성 등을 들어 왔다. 하지만 2016년 직업성 암 승인율을 보면 우리나라는 55.4%로 독일 30.1%, 덴마크 26.5%, 이탈리아 40.0%보다 높다. 즉 산재 인정이 어렵다는 것만으로는 한국의 낮은 직업성 암 인정 건수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추정치와 인정건의 괴리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주요 유럽 국가들의 경우도 인정된 직업성 암 건수가 추정된 직업성 암의 30%를 넘기 어렵다. 물론 가장 높은 독일이 약 22%였고 프랑스 9.5%, 덴마크 7% 등으로 한국 2.1%보다는 높은 수준이지만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낮은 보고율 또는 산재 신청률 때문으로 추정한다. 독일의 2016년 직업성 암 신청자는 1만5천234명으로 산재보험 가입자 10만명당 38명인데, 같은해 한국은 228명으로 10만명당 1.2명이다. 즉 한국은 직업성 암 신청자가 매우 낮다. 일반적으로 암은 발암물질에 노출 후 10년 이상 후에 발생하는데, 10여년 전 사업장 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도 드물다. 작업장 발암물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로 환자 개인과 의료인의 열정만으로는 산재 신청을 확대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산재보험 가입 대상 확대 정책과 함께 산업보건운동단체 중심의 직업성 및 환경성 암 환자 찾기 프로그램은 노동자와 전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는 의미 있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인 직업성 암 신청 확대를 위해서는 노동자·의료진 개인의 관심을 촉구하는 것을 넘어 사회가 먼저 찾아 나서는 시스템으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우선 사회적 데이터베이스를 연결해 우리나라 노동자의 직업별·산업별 암 발생 위험집단을 계속 모니터링해야 한다. 제철업·주물업·조선업·건설업 등 전통적 고위험 산업은 추적 관리하고, 반도체 산업처럼 새로운 산업에 대해서는 원인 모를 암 증가를 감지해 주기적인 역학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2017년부터 빅 데이터 기반 ‘직업 코호트’를 이러한 목적 아래 구축 중에 있다. 한편 직업성 암으로 의심되면, 의료진이 직접 의무기록 시스템에 자동 등록해 의료진의 관심을 유도하는 나라도 있다. 대부분 퇴직 후에 발병하는 암 관리를 위해 우리나라가 운영하는 근로자 건강관리수첩은 등록 노동자수가 적어 실효성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독일의 예처럼 발암물질 노출 노동자를 자동 등록하는 체계를 통해 관리하는 것도 벤치마킹할 만하다.

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못 하는 근본적 이유 중 하나는 산재보험 가입 사각지대, 고용상태 불안정 등의 영향이 크므로 위의 정책 대안들을 통한 산재 신청은 기대만큼 확대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직업성 암 정책은 산재 인정 확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며, 조기진단과 추적조사를 통해 예방하고 관리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 직업성 암은 수십년 앞을 내다보는 중장기적 구상으로 예방해야 한다. 지금 예방을 시작하면, 성과가 10년 뒤에나 나타나 담당기관 입장에서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시작하지 않는다면 노동자 암관리는 10년 더 미뤄지게 된다. 올해 역학조사가 결정된 포스코 노동자 암 역시 10년 이상 누적된 위험이 이제야 드러난 문제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늦었다고 생각되는 지금이 가장 빠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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