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이 부부갈등 해소해주는 해결사"…무쟁의의 핵심은 '공유'




△ 99년 열렸던 남북노동자 축구대회 서울지역본부 예선전. 아들 정수, 정민이와 함께


세상에는 같은 일을 하는 부부들이 참 많다.

연예인 부부, 음악가 부부, 방송인 부부처럼 많이 알려져 세상의 이목을 받았던 커플이 있는가하면, 노동현장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노조간부 커플도 있다. 하지만 노동운동을 함께 하는 부부 이야기는 아직까지 낯선 세상이다. 이들의 첫 만남은 남들처럼 커피숍이나 영화관이 아니라 주로 투쟁현장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5분 데이트'에서는 현직 노조간부 부부들의 삶과 사랑,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면서 일어난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 첫 번째로 민주노총 서울본부 배기남 사무처장(40·남편)과 공공연맹 조귀제 조직국장(38·아내)의 가정을 들여다봤다.

■ 90년 메이데이 일주일 후 '결혼약속'…"이유 없이 좋은 거죠."

"서울대(90년 메이데이 행사장소)에 들어가려는데 경찰이 막더라구요. 안되겠다 싶어 담을 넘다가 그만…뼈에 금이 갔습니다." 조귀제 국장은 그 당시 중원전기노조 간부였다. 다리 부상으로 아픔을 호소했던 그 순간, 그녀를 업고 집회장으로 갔던 '흑기사'는 다름 아닌 배기남 사무처장(당시 서노협 조직부장). 이미 오랜 전부터 배처장의 마음속에 조국장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자연스런(?) 행동이었을 것이다.

"평소에 조국장이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메이데이 일주일 후였지 아마…깁스를 하고 있던 조 국장 자취방에 술을 사가지고 찾아갔죠.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 그랬더니 '좋습니다.' 그런 던 걸요." 배처장의 덤덤한 말.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 조 국장에게 물었다. 한번도 튕기지 않았어요? "하하하∼ 1년 정도 활동하는걸 봐 왔고, 신뢰가 있었으니까..뭐" 조국장은 다소 수줍은 듯한 웃음으로 '튕기지 않고 단번에 오케이 한 것'을 시인했다.

배처장과 조국장은 그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일상활동 속에서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됐고 '조금' 용기 있는 배처장의 프로포즈에 조국장은 마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딱∼감이 온 거죠. 학력, 외모…뭘 기준으로 따지는 순간부터 사랑은 성립될 수 없어요. 다만 조국장이 성실하게 운동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습니다." 조국장의 어떤 점이 좋았냐? 는 물음에 '뭐?'라는 기준이 들어가는 순간, 사랑이 싹틀 수 없다고 배처장은 명쾌하게 말한다.

■ 노동운동이 부부갈등 해소해주는 '해결사'…"어머니가 없었다면 불가능"

배처장 조국장 부부는 '긍정적인 생각'이 몸에 붙은 사람들이다. 연애 1년 6개월, 결혼 만 10년이 되는 긴 시간 동안 기억나는 '큰 싸움'이 없을 정도로 무난한 생활을 해왔단다. 부부관계 이전에 사람관계인데 어떻게 부딪힘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갈등의 소지가 있으면 제가 피하는 성격입니다. 사실 제가 게을러서 못 챙긴 부분 때문에 싸우는 경우가 많거든요." 대개 부부관계 갈등요인은 권위적이거나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데서 생긴다며 '그것'만 버리면 모든 게 편하다는 것이 배처장의 '부부 무쟁의 방법'의 핵심.

"왜 안 다투겠어요. 하지만 쌓아두지 않습니다. 바로 풀죠. 또 깊은 상처를 남기려고 하지 않아요." 배처장의 '여유만만'이 가끔 조국장의 속을 뒤집어 놓을 때도 많지만 그때마다 곰곰이 생각한단다. "화가 나지만 못살 정도인가?" 이러니 싸움이 되나.

'무쟁의' 노선을 걷던 이들 부부에게도 물론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다. 조국장의 노동운동 배움터였던 중원전기가 부도나고 첫째 아들 정수(10살), 둘째 아들 정민(8살)이가 태어났다. 이 사회가 여성노동운동가들에게 만만한 곳은 아니다. 육아문제라는 단단한 벽 앞에서 조국장은 노동운동의 테두리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의식적으로 '끈'만 놓지 말자고 다짐하는 날들이 길어졌다. "운동 때문에 저는 바빠지는데 아내는 집안 문제를 혼자 고민해야 하니까 자꾸 부딪혔죠. 공유되는 부분이 점점 줄어들었던 거예요." 배처장은 집안이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아내가 다시 노동운동 품으로 가야한다는 결심을 한다. 때마침 95년 한 노조의 사무차장 자리가 공석이 됐고 배처장은 아내를 강력 추천, 조국장의 노동운동은 다시 시작됐다.

"사실 둘째 아이 낳고 운동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때 남편이 적극적으로 권유하더군요." 조국장은 잠시 공백을 깨고 열정 가득한 '아줌마' 노동운동가로 다시 태어났다. "시어머님이 없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예요." 어머님의 희생이 자꾸 마음에 걸리지만 그만큼 더 열심히 살겠다고 이 부부는 입을 모은다.

■ 운동하는 부부 "이래서 좋다."

"서로 상황에 대한 공유가 되는 것이 제일 좋죠.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니까요. 또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 인생관이 비슷하다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배처장은 '공유'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짝을 이루는 걸 적극 권장해 주고 싶단다. "대화 꺼리가 자연스레 생겨요. 고민의 범위가 비슷하고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애쓰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막지 않으면 계속해서 나올 태세. 나쁜 점도 있을 것 같은데? "노동운동이라는 같은 울타리에 있다보니 가끔 남편에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조금 불편하지만 대부분 괜찮아요." 조국장의 말이다.

용인에 사는 배처장-조국장 부부는 왕복 3시간 정도 걸리는 출퇴근 시간(지하철)을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함께 한다. 하루를 시작하고 정리하는 가장 귀한 그 순간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배처장과 조국장 부부의 비밀 한가지. 연애했을 때나 결혼을 한 후에도 투쟁 현장에서 서로 마주치게 되면 대놓고 반가운 척을 하지 못한다. 운동이라는 울타리 분위기도 있겠지만 이들의 성격도 '한몫'. 현장에서 배처장-조국장 부부가 은밀히 나누는 인사법이 있다. 입 꼬리를 최대한 올려 만든 '미소.' 배기남 처장이 집회현장에서 '씨익∼'하고 웃었을 때를 주의 깊게 보라. 100m 안에 그의 동지이자 아내 조귀제 국장이 또 '씨익∼'하고 웃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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