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날이 풀려 꼭 봄만 같아 지난 주말 딸아이 손 잡고 시 외곽 너른 화원엘 찾아갔다. 얼었던 흙이 빵처럼 부풀었기에 방울토마토와 오이고추와 온갖 노랗고 빨간 꽃이며 넝쿨 식물 따위를 심어 볼 생각이었는데, 거기 화원 비닐하우스 앞이 휑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주인장이 문 열면서 말했다. 아침저녁으로 추워 얼어 죽기 십상이란다. 한낮 포근한 볕에 설레었던 마음엔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붙었다. 이맘때 사람들은 얇은 봄옷 걸치고 나왔다가 추위에 떨곤 한다. 길가 해 잘 드는 곳 노란 꽃잎 빼꼼 내민 개나리와 성질 급한 벚꽃을 보며 괜히 설렌다. 어디 높은 산이고, 바닷가에서 해 뜨는 걸 지켜볼 때도 그렇다. 칠흙 같은 하늘에 누렇고 불그레한 빛이 서서히 번질 때가 가장 설레는 시간이다. 그래선지, 여명은 본뜻 말고도 희망의 빛이란 뜻을 품는다. 어느 날 청소노동자가 농성 중인 트윈타워 앞에 밥 실은 트럭 한 대가 찾아와 육개장에 따신 밥 한 그릇씩을 나눴는데, 그게 그렇게 고맙더라고, 그런 데에서 희망을 본다고 지회장이 말했다. 지난 겨울, 계속 일하는 것이 새해 소원이라고 팻말에 적어 시작한 싸움인데 100일 가까워 훌쩍 봄이다. 종종 지치기도 하는데, 응원해 주고 연대해 주는 사람들 덕에 힘이 난다고 하얀 상복 차림 농성자가 말했다. 노조 하고, 고용승계 싸움하면서 배우는 게 너무 많다고, 비록 가방끈은 짧지만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이라 즐겁다고도 했다. 지난밤 그곳 용역 경비원과 또 한바탕 실랑이를 겪었다는데도 끄떡없단다. 목소리 쩌렁쩌렁 주눅들 줄을 모르고 그곳 로비에 높았다. 오늘도 많이 배웠다고, 그 밤 멀리 사는 남편에게 전화로 말했단다. 똘똘 뭉쳐야 한다고, 어디든 용역이며 하청 같은 게 너무 많아 문제라고, 노동자 권리찾기 강의가 술술 막힘없다. 여사님 소리 듣는 황혼 녘에 찾아온 여명이다. 겨울 끝자락 봄기운이 농성장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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