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백기완 선생은 생전에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표절 논란 6년 만에 다시 소설을 출간하는 신경숙을 ‘국내 언론 중 본보와 첫 인터뷰’라는 작은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동아일보 18일 21면) 동아일보는 이 기사에서 신경숙이 “인터뷰 중간 여러 차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며 유명 소설가의 심기를 경호하거나 “국내 언론 인터뷰에 응한 건 2015년 6월 이후 5년8개월 만”이라고도 했다.

세상을 해석하기는커녕 보려고도 않는 예술이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렇게 살뜰히 챙길까. 손가락을 접으며 시간을 측정한 끝에 ‘5년8개월’ 만에 첫 인터뷰라는 단어를 챙겨 넣었을 기자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런 세심한 배려는 먹고살 만한 대기업에서 무한 반복되는 중대재해로 목숨 잃은 노동자의 사고 간격을 셈할 때나 필요하다.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우주의 소멸이다.

‘국내 언론 중 본보와 첫 인터뷰’란 말은 표절 논란에도 외국 언론엔 인터뷰한 적이 있단 소리다. 그것도 팩트라고 챙겼을 기자의 꼼꼼함에 질식한다.

그 소설가가 세상에 관심이 없듯이, 나도 그 소설가의 삶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유력일간지 문화면엔 그런 작가가 넘쳐난다.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한때 공장 생활을 했던 그가 그럴진대 다른 예술가는 말해 무엇할까. 그와 같이 모진 세월 막노동으로 길러낸 말과 글로 세상을 질타해 온 시인 송경동은 세상을 끌어안은 채 한 달 넘게 굶어 초점 잃은 눈빛으로도 정신을 곧추세우고 시대의 등불이 됐다. 비슷하게 출발한 두 작가는 이렇게 극명하게 갈렸다. 마치 김진숙과 김진숙의 변호인 문재인처럼.

책도 나오기 전부터 ‘첫 인터뷰’라는 딱지를 붙여 유명작가의 주례사 같은 인터뷰를 헌정하는 우리 언론이, 그 에너지의 반의반이라도 늪에 빠진 혁명을 구원하려 앞장선 예술에 눈길 한 번 준 적이 있던가.

2030세대에게 ‘영끌 주식’과 ‘영끌 부동산’만 외쳐대는 언론은 ‘2030세대가 지난해 해외여행 대신 골프장 가고 수입차 샀다’고 보도했다.(중앙일보 18일 B2면) 어느 별에서 온 언론인가.

매일경제는 지난 9일자 1면 톱과 2면에 걸쳐 인천공항을 넘어 마사회도 정규직 전환이 독이 됐다고 보도했다. 2면 기사는 ‘알바생 정규직화 매달리다가… 마사회 지난해 신입채용 0명’이라며 또 취준생과 비정규직을 이간질하기 바쁘다. 그랬던 언론이 쿠팡이 단기 알바 3천명을 상시직으로 전환하고 주식 200만원씩 준다는 기사는 미담처럼 쏟아낸다.

코로나19 시대에 엄청난 수익을 챙긴 플랫폼 기업은 하루 12시간 일하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밥 먹고 쉬는 시간 모두 합쳐 고작 35분인 택배노동자가 창출한 이윤을 고스란히 착복했다.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는 코로나19와 함께 줄을 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2030인데 언론은 골프장 가고 수입차 사는 2030에만 열광한다.

남양주 진관산업단지와 충남 아산의 귀뚜라미보일러 공장에서 코로나19 집단 감염자가 100명 이상씩 나왔다. 정부는 5명도 모이지 말라고 하지만, 제조업 노동자들은 오늘도 수백 명이 모여 일하는 공장으로 출근할 수밖에 없다. 남양주 플라스틱 제조공장엔 100명 넘는 이주노동자가 기숙사 생활을 해 집단 감염이 불가피했다.

유흥업소 사장들 시위만 보도할 일이 아니다. 이런 곳에도 기자의 눈길이 미쳐야 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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