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호 변호사(금속노조법률원 울산사무소)

대상판결 : 부산고법 2021. 1. 13. 선고 2020나50822 근로자지위확인 등

소송의 경과

선박 건조 등에 필요한 업무는 선박을 구성하는 블록을 만드는 선행작업, 선행작업에서 만들어진 블록을 도크에서 선박으로 건조하는 후행작업, 취부(블록과 블록을 붙이는 작업), 용접, 사상(용접표면을 매끄럽고 깔끔하게 해 도장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작업), 도장, 엔진, 설계 등이다. 현대중공업은 선박·플랜트 건조업무 전반에 걸쳐 비정규 노동자들을 사용하고 있고, 정규직 노동자들도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원고들은 선박 건조에 필요한 여러 업무 중 사상·취부 업무를 10년 이상 수행했던 사람들이다. 조선업에서는 최초로 울산지법에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고, 항소를 제기했으나 부산고법 제1민사부는 1월13일 기각했다.

상당한 지휘·명령의 존재 여부

현대중공업은 정규직·비정규직을 불문하고 설계도, 설계도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공요령서, 작업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작업표준 등을 배부한다. 부가적인 작업지시는 필요하지 않아서, 원고들은 작업표준 등이 구속력 있는 지시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선박은 선주의 요구사항을 반영해 설계할 수밖에 없고 하청업체도 피고와 맺은 도급계약에 의해 선박의 설계도 등에 따라 작업할 의무가 있고, 피고가 하청업체에게 설계도·작업표준 등을 제공한 것은 도급인으로서 수급인에 대한 일의 완성을 위한 지시에 해당한다고 봤다. 피고가 비정규 노동자들이 작업한 결과물이 설계도·작업표준 등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검사하고, 하자가 있으면 즉시 재시공을 요청한 것은 도급계약에 따른 도급인의 검수권 행사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다음 이러한 사정 등을 근거로 상당한 지휘·명령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재판부의 논리를 단순화하면 ① ‘선주의 요구사항을 반영해 선박을 설계하고 이에 따라 작업수행’ → ② ‘하청업체도 도급계약에 따라 선박의 설계도 등에 따라 작업할 의무 존재’ → ③ ‘피고가 지시하는 설계도·작업표준·시공요령서 등에 따라 협력업체 근로자들이 작업을 수행해도 이는 도급인의 지시에 불과한 것’이라는 논리 구조를 취하고 있다. 선주의 요구사항을 반영해 설계하는 것은 조선업의 산업적 특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이 우월적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는 도급계약에서 설계도를 제공하고 이에 따라 하청업체 소속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작업을 수행한다고 정하기만 하면 상당한 지휘·명령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재판부는 조선산업의 산업적 특성에만 매몰돼 다음과 같은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의 작업표준 등이 도급인이 주문하는 물건의 재질·수량·품질 등의 기준을 정해 준 다음 수급인 또는 수급인의 이행보조자가 자신이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결과물이 생성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 아닌지만을 감리·검수하는데 그치는지, △아니면 도급인이 수급인의 노동자가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작업내용·방식·절차·순서까지 직·간접적으로 지시를 내리는지, △이러한 지시에 대해 수급인이 도급인이 정한 품질 기준의 범위 안에서 도급인의 정한 방식과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했는지, △변경권을 보유하지 못하고 도급인의 지시가 수급인의 이행보조자에게 직접적으로 관철되는지 등을 판단해야 했다.

현대중공업 사업에 편입됐는지 여부

원고들은 현대중공업이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여러 블록을 분담시켜 취부·용접·사상업무를 함으로써 공동으로 하나의 선박을 건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담당하는 블록에 파견을 나가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또 용접은 정규직이, 사상작업은 비정규직이 담당하게 하는 방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등 공동작업을 해 현대중공업의 사업에 편입됐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통상 개별공사계약에 따라 특정 블록별로 피고 소속 노동자들과 구분된 공간에서 작업을 수행했고, 동일한 공간에서 작업을 하더라도 서로 작업대상 및 작업내용을 달리해 각자가 맡은 작업을 수행하므로 공동작업을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의 논리를 단순화하면 생산공정에 칸막이를 쳐서 공간을 분리하기만 하면 공동작업이 아니고, 작업대상이나 작업내용만 다르면 공동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2015. 2. 26. 선고 2010다106436)을 보면, 일부 원고는 비정규직만 근무하는 공정에 근무했고, 대표적인 파견공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의장(수만 가지 부품을 도장을 마친 차체에 장착해 자동차를 완성하는) 공정에서 근무하는 작업자들도 모두 다른 부품을 다른 위치에 다른 방식으로 장착하고 같은 부품을 장착하는 작업자는 존재하지 않는데, 대법원은 이러한 작업 형태에 대해 공동작업이라고 판단했다. 대상판결 재판부의 판단은 확립된 대법원 판례 법리에 반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작업이 독립적으로 수행되고 그 자체로 완결이 되기 때문에 선박 건조작업이 독립적 완성품끼리의 단순한 결합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비정규 노동자들의 작업 결과물이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아 물리적·기능적으로 결합해야만 작업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어서 공동작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지를 따져야 했다. 비정규직이 피고의 사업에 실질적 편입이 됐는지를 판단해야 했다.

인사·노무 결정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했는지 여부

원고들은 하청업체가 설립되면 현대중공업이 투입 인원을 결정했고, 실제 작업에 투입한 인원을 계속적으로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휴게·휴가 시간도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았고 하기휴가비, 설·추석 귀향비, 성과금, 선박인도 격려금 등을 현대중공업이 직접 지급하기도 해서 하청업체의 독자성이 없다고 원고들은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하청업체는 별도의 취업규칙을 마련하고, 출·퇴근 휴가 등 근태상황을 파악해 근무 평가를 하는 등 독자적인 인사권을 행사했다고 봤다. 현대중공업이 하청업체의 작업인원·휴일근무 인원을 파악한 것은 산업안전 보건 조치를 위한 필요에 따른 것이고, 하청업체가 업무의 증가 등으로 ‘물량팀’에 일부 작업을 재하도급하기도 하는 등 독자적인 인력운영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등을 이유로 하청업체의 독자성을 인정했다. 그런데 파견근로 관계에서도 원칙적으로 사용자는 파견업체다. 파견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은 파견사업주의 인사·채용·전직(작업배치)과 관련한 실체를 인정하고 있다(34조1항). 그러므로 하청업체가 기본적인 인사권이 있으며 취업규칙도 작성해 신고할 의무를 부담한다. 특히 일응 사용사업주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이라고 하더라도,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 적법하게 근로자파견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처럼 도급의 외관을 띈 채 불법적으로 근로자파견 사업을 할 때는, 외관상 파견사업주가 사용사업주의 권한도 행사하는 것처럼 위장한다. 따라서 채용 같은 기본적인 인사권, 취업규칙 제정 등은 하청업체가 독자적으로 수행했는지는 중요한 쟁점이라고 볼 수 없다. 현대의 제조업 생산 현장은 평균적이고 균질화한 노동력을 통해 단순·반복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노동자 개개인의 개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용사업주는 파견사업주가 투입하려는 노동자가 일정 기능 이상만 보유하면 노동자 개개인에는 관심이 없다. 사용사업주가 필요하다고 정한 인원만 파견사업주가 투입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므로 근로자파견에서 중요한 판단 요소는 일반적 작업배치·변경권을 누가 행사했는지 또는 누구에게 그러한 권한이 유보돼 있는지 일 것이다. 즉 작업 내용, 작업 인원, 작업 위치, 작업 기간 등을 결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심리가 이뤄져야 했다.

하청업체가 전문성·기술성을 갖췄는지 여부

원고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작업을 같은 공간에서 수행하므로 양자가 구분되지 않고, 선박 건조는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산업인 데 비해 하청업체는 소장·총무 등의 인력관리 조직밖에 없고, 작업에 필요한 설비 등은 모두 피고 소유이며 용접봉·장갑 등 소모품도 모두 현대중공업이 제공했으므로 하청업체는 독자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취부·용접·사상 업무에 대해 개별공사계약을 체결하므로 현대중공업의 공사와 구별되는 점, 하청업체는 취부·용접 등 관련 기술 교육을 이수해 자격을 취득한 노동자를 채용하고 작업반을 편성한 점, 현장소장·반장 등 관리직 직원을 두는 등 독립적인 조직 및 인원을 갖추고 있는 점, 용접봉 등을 제공한 것은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안전조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점 등에 비춰 하청업체의 전문성·기술성이 있고, 독립적 기업조직이나 인원 등을 구비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현대차를 비롯한 불법파견이 인정된 사례에서도 모두 개별 공사계약을 체결했다. 대법원은 당사자가 붙인 계약의 명칭이나 형식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근로관계의 실질을 밝히라고 거듭해서 판시했다. 따라서 대상판결 재판부는 업무의 내용·방식·순서 등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업무와 구분 가능한지, 도급계약이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별도의 작업지시가 필요한 것이거나 지나치게 세부적이어서 별도의 작업지시가 필요한 것이 아닌지 등을 심리해야 했다. 그리고 플랜트산업 등은 용접·취부 등 기술자격을 갖춘 작업자들이 더 많은데, 이런 업체도 재판부의 논리라면 얼마든지 선박 건조업무의 전문성·기술성을 갖췄다고 봐야 한다. 대법원 판결에서 판시한 전문성·기술성은 선박 건조업무의 전문성·기술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지, 용접·취부 등의 기술을 갖춘 노동자들을 채용하면 전문성·기술성이 있다고 본 것이 아니다. 선박 건조업무의 전문성·기술성을 갖췄다고 하려면 독자적으로 공수 인원을 산정할 수 있어야 하며, 작업의 순서·작업방식·용접봉의 재료 등을 결정할 권한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러한 점에 대해 재판부는 제대로 판단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또 용접 장비와 용접봉 등이 산업안전과 관련이 있으려면 산업안전을 고려해 작업환경과 작업방식에 맞춰 현대중공업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어야 하고, 현대중공업의 작업 현장에서만 사용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이 제공한 용접 장비 등은 일반 작업현장에 쓰이는 것이다. 일반적인 작업 도구가 산업안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며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 산업은 호황기에는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을 사용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다가 불황기가 도래하니 업체 폐업, 체불임금 같은 고통은 오롯이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몫으로 전가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산업에서 제기된 최초의 불법파견 소송으로서, 현대중공업의 왜곡된 고용구조를 타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는데 재판부의 판단은 계약형식이나 외관에 치우친 판단으로 매우 아쉽다. 대법원에서는 부산고법 재판부의 판단이 바로잡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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