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김말룡에 대한 평전이 출간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됐으니 늦은 감도 있다. <김말룡 평전>(학민사) 저자 이창훈씨는 “그동안 쓰겠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한국노총에도 몸담고, 민주노총과도 함께했던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아 중도에 포기한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을 떼어 놓고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단 한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늘 노동자에게 진심이었다.

반공주의 노동운동가?

1927년생 김말룡은 일제의 조선수탈이 본격화하던 1940년 14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오사카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일본공산당사와 레닌의 저서들을 읽었다. 해방과 함께 열아홉 살이 된 김말룡은 귀국해 조선펌프제작소에 입사하고 노동운동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김말룡은 전평 소속 조선펌프제작소노조가 아니라 대한노총을 택한다. 김말룡은 대한노총 창립대회 참석자 48명 중 한 명이다.

저자는 “10대 나이에 일본에서 공산주의를 접한 김말룡은 공산주의가 노동자를 위한 사상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위한 노동자로 변질됐다고 판단해 공산주의를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대한노총 역시 노동자가 아니라 대한노총 총재를 맡은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으로만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반공 경력’ 을 앞세워 대한노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노총 출범일인 1961년 8월30일 김말룡은 구속됐다. 외신기자들에게 “쿠데타 세력이 민주노조운동의 완전 말살을 기도했다”고 폭로한 이유 때문이다. 이후 한국노총 개혁을 내걸고 김말룡은 한국노총 위원장 선거에도 세 차례 도전했지만 유신체제의 한국노총은 철옹성이었다. 결국 위로부터의 노동개혁에 실패한 김말룡은 영세명 ‘이냐시오’로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명동노동문제상담소장을 맡았다.

‘노동 천시’를 뒤집어 엎어라

야만의 80년대를 지나고 1992년 김말룡은 14대 국회의원이 됐다. 신민당 비례대표 19번으로 당선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김말룡의 말년이 아름다웠던 것은 국회의원이 됐기 때문이 아니라 국회의원이 돼서도 40년간 지켜 온 신조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말룡이 의원 시절 발의한 법안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국회의원으로서 그의 행보는 지금도 놀라울 정도로 친노동자적이다.

해고노동자가 재판을 받을 때는 세 시간 동안 법정을 지켰다. “바쁘신데 어떻게 오셨냐”는 해고노동자의 물음에 그는 “국회의원 배지라도 달고 나이든 노인이 법정에 앉아 있으면 위에서 판사들이 볼 것 아니냐”고 답한다. 영창악기 공장에서 20일째 단식 중이던 노동자를 만나러 간 길에서는 “국회의원이 이런 곳에 올 리 없다”고 막는 수위에게 출입이 막혀 경찰이 출동한 뒤에야 공장에 들어가기도 한다. 부당노동행위로 국회에 불려 와서 뻔뻔하게 위증한 사용자를 같은 당의 상임위원장이 수개월째 고발하지 않자 기업에서 동료 의원들이 돈을 받은 사건을 폭로한 이른바 ‘국회 돈봉투 사건(국회에서 위증 의혹을 받던 한국자동차보험[현 DB손해보험] 상무가 국회 노동위 소속 의원들에게 돈봉투를 돌린 사건)’도 이런 김말룡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를 기억하는 노동자들이 김말룡 의원님’보다 ‘말룡이 성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저자는 “김말룡은 일찍이 우리 사회의 노동 천시에 경종을 울린 사람이면서 누구보다도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싸웠다”며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이념보다는 노동자 중심주의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해방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사에서 좌우 이념 논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다. <김말룡 평전>은 이념을 떠나 전설적 노동운동가의 삶에 온전히 집중한다. 무엇보다도 노조 간부가 국회의원 직업 5위를 차지하고 있는 21대 국회에서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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