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라면을 먹거나, 어쩌다 텔레비전 한 번 보는 일이 세상 중요한 아이에게 아빠는 종종 단호한 목소리 앞세워 약속도 지키지 않는 ‘나쁜 사람’이다. 아차차, 마음 급한 나머지 시원스레 쏟아냈던 그 무슨 쿠폰 생각이 떠올라 할 말을 잃고 만다. 서로 약속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잔소리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눼눼’ 하고 받아넘기는 아이의 태도를 꼬투리 잡아 들들 볶는다. 나빴다. 사과하고 약속은 지킬 일이었다. 요즈음 세간에 이런 저런 희망찬 약속이 떠도는 걸 보니 곧 선거인가 싶다. 공약은 자주 빌 공자 오명을 뒤집어쓴 채, 쓰레기통에 처박혔는데, 오물 아랑곳하지 않고 거길 뒤져 자꾸 들춰내는 탐정 같은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그 한마디에 웃었고, 지금 흐릿한 약속에 우는 사람들이다. 노사가 합의한 것을 지키라는 뻔한 말을 하느라 밥을 굶는다. 묵은 약속을 다시 읽는 동안 목이 쉰다. 잘려 나간다. 대권행 고속열차가 곧 출발한다. 선물 보따리 같은 약속이 어김없이 짐칸에 가득 실릴 텐데, 종착역에 이르러 유실물로 남을 것들이 적지 않다는 걸 사람들이 안다. 귀중한 것도 아니었던지 찾으러 오지 않으면 폐기될 운명인 것도 안다. 그럼에도 다들 여태 살면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배운 적은 없을 테니 유실물 센터 앞에서 농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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