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1989년 8월22일 노사정 대표자들이 모여 노사정이 공동출연하는 전문노동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래서 탄생한 곳이 지금의 한국고용노동교육원이다. 하지만 지난 10여년간 교육원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공공기관 선진화라는 미명 아래 교육원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공무원과 학교교원에 대한 노동교육과 노동행정 종사자 직무교육 같은 공공부문 노동교육 파트만 남아 한국기술교육대 부속기관인 ‘고용노동연수원’으로 이관됐다. 노동교육기관의 부재는 노동의 가치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런 어두운 역사를 딛고 지난 10월, 한국고용노동교육원이 다시 문을 열었다.

교육 대상을 노사관계 당사자와 고용노동 업무 종사자에서 모든 국민으로 확대하고, 척박한 노동인권에 대한 인식을 폭넓게 하겠다는 목적도 분명히 했다. 첫 임무를 맡은 이가 노광표(58·사진) 한국고용노동교육원장이다. 사실 그의 호칭은 ‘원장’보다 ‘소장’이 익숙하다. 1995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문을 열었을 때부터 함께한 그는 2013년부터 7년간 소장으로서 연구소를 이끌었다.

노동교육원의 새 출발을 노광표 원장이 맡으면서 제대로 된 노동교육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2일 오전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노동교육원에서 노광표 원장을 만났다.

- 오랫동안 몸담았던 연구소를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결심이 쉽지는 않았다. 잘했든, 못했든 미력하게나마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연구소가 다른 곳에 비해 고령화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 역시 1~2년 전부터 소장을 그만두겠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부에서는 반대도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개혁 의지가 약해지는 시점에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장을 맡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노동교육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실천해 온 분야다. 노동교육 제도를 바꾸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노동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로 가려면
교육이 바뀌고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

- 교육원의 역사가 깊다. 그만큼 부침도 많다. 지난 정부의 노동교육원 사업을 어떻게 평가하나.
“노동교육원의 뿌리는 1989년이다. 노사정 합의를 통해 설립한 재단법인 한국노사교육본부가 모태다. 그때 한국노동연구원도 설립됐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직후 노사갈등이 폭발하면서 갈등관리와 노동의 목소리를 제도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후 30여년간 법도 만들어지고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다. 공공과 민간의 제도화된 노동교육 틀로 자리 잡아 나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2009년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으로 기관의 독립성을 상실하고 한국기술교육대 부속기관으로 들어가게 됐다. 교육 대부분이 공무원 직무교육으로 한정됐다. 더 큰 문제는 일했던 직원들이 창의적인 기획이나 사업을 펼치기보다는 집행기관 이상의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2009년 이후 10여년은 노동교육원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시기였다.”

- 긴 터널을 지나왔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교육 정책은 어떤가.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 사회를 만들자고 했다. 노동존중 사회는 법·제도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노동의 가치, 땀 흘려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예의, 일터의 주인은 사용자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는 인식 전환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대단히 더딘 상황이다. 노동을 시혜적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노동이 주체가 되고 노동자가 인권 수혜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노동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로 가려면 교육이 바뀌고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 그런 고민을 할 단위가 필요했다. 노동교육원이 독립한 이유다.”

- 올해 한국고용노동교육원법이 다시 만들어졌다. 어떤 의미가 있나. 이전과 차이는 무엇인가.
“법 1조 목적부터 다르다. 현행법은 노사관계 당사자, 고용노동 관련업무 종사자, 국민에 대한 고용노동교육을 실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고용노동교육 대상자를 종사자에서 국민 일반으로 확대했다. 노동인권에 대한 인식을 폭넓게 하는 것, 그것을 통해 건전하고 합리적이고 참여협력적 노사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교육원의 설립목적이다. 교육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된 것이고 노동자냐 아니냐를 떠나 일하는 모든 사람, 특히 노조 밖에 있는 취약계층 노동자와 자영업자에게 노동교육 영역이 확대된 것이 한국고용노동교육원법의 핵심적인 변화다.”

- 얼마 전 서울시교육청이 주최한 노동인권교육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한 참가자가 ‘아이를 사업가로 키울 계획인데 왜 학교에서 노동교육을 하느냐’고 따지더라. 지금의 노동교육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일터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일터에서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데 노동인권교육이 과연 제대로 될 수 있을까 반문하게 한다. 초·중·고 학생들 대부분이 커서 일하는 사람, 노동자가 된다. 그런데 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건물주’라고 한다. 한탕주의로 돈을 버는 게 뭐가 문제냐는 이런 인식은 지금의 노동조합에 주는 함의가 있다.”

- 어떤 함의인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의 임금인상과 노동시간단축은 이뤄지고, 삶의 질이 향상됐다. 하지만 그 혜택을 받은 사람은 소수다. 노조 조직률이 11.8%인데 열 명 중 한 명만 그나마 노조의 혜택을 보고 있다. 노조 울타리 밖에 있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노동인권교육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일하는 사람의 권리, 땀의 가치를 존중하는 교육은 제도교육의 기본이 돼야 한다. 그런데 노동인권교육이 아직도 의무교육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다. 교과서에는 기업존중 이야기가 지배적으로 담긴다. 기업이 잘 돼야 노동자도 살 수 있다는 논리다. 유럽처럼 노동인권교육이 일상적으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 체계가 없고 일회성 교육에 그친다. 노동인권이 내면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노동교육 수요도 많고, 노동인권교육을 하는 기관도 늘었다.
“노동인권교육이 지난 5년 새 활성화된 것은 사실이다. 노동관련 비정부기구(NGO)의 활동이 있었고 서울시, 경기도 같은 지방정부와 교육청도 많이 노력했다. 양적으로는 확실히 늘었다. 문제는 중복이 많고 이들 조직 간 네트워킹이 없어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노동교육 허브기관 필요
양 늘었지만 중복 많고 시너지 적어

- 흩어진 노동인권교육의 시너지를 위해 노동교육원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지자체나 교육청마다 비슷비슷한 동영상을 만들고 교재를 생산한다. 노동교육원이 노동인권교육을 얼마나 확충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용노동교육의 허브기관이 되는 것이다. 노동인권교육을 하는 사람들의 교류를 촉진하고 판을 만들어 주는 게 우리 역할이다.”

- 앞으로 교육원이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된다. 취임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취임한 지 이제 두 달반이 지났다. 지난 10여년간 부설기관으로 있다 보니 직면한 문제는 사업이 아니었다. 조직 내부 혁신부터 했다. 일하려면 동기부여가 중요하다.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기존 2본부 체계를 기획지원본부·직무교육본부·교육본부와 교육개발실로 개편했다. 3본부 1실 체계다. 처음으로 여성이 본부장을 맡았다. 연구개발 파트를 강화했고, 청소년 인권교육은 이에 걸맞은 감수성과 네트워크를 갖추도록 젊은 팀장을 발탁했다.”

- 앞으로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사업은 무엇인가.
“코로나19로 교육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올해 초만 해도 감염병 위기가 하반기 가면 진정국면을 맞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시나리오가 있었다. 안이한 판단이다. 노동교육원의 장점은 집체교육이었다. 교육원에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에서 묵으며 강의도 듣고 토론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한데 그런 시스템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지금 연수원은 코로나19 확진자를 위한 생활치료센터로 이용하고 있다. 내년에는 90%를 온라인으로 전환하고 10%만 오프라인 교육으로 실시할 예정이다. 온라인 교육효과를 높이기 위해 강의 방식도 개편하고 교육 콘텐츠도 새롭게 개발하고 있다. 게임이나 퀴즈, 분반토론 같은 다양한 교육기법을 활용하고 5분 이내 소비할 수 있는 짧은 학습콘텐츠를 만들 계획이다. 내년 상반기 중 연구용역을 실시해 온라인교육 실태를 분석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해도 교육효과가 떨어지지 않도록 고민하고 있다.”

“근로감독관 전문성 높아져야 근로감독 서비스 질 개선”
노동부 직무교육 기간 늘리고 방식 개선해야

- 노동부 직무교육 과정은 어떤가.
“직무교육 대부분은 근로감독관 교육이다. 근로감독관 전문성이 높아져야 근로감독 서비스 질도 높아진다. 유럽은 근로감독관이 되면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교육을 받는다. 우리는 6주면 끝난다. 직무교육(OJT)방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한계가 있다. 공인노무사 조언을 받고 인터넷으로 최신판례를 찾아보고 오는 전문성을 가진 소비자의 요구를 쫓아가지 못하기도 한다. 근로감독관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교육기간을 확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초·전문가·심화과정 같은 모듈식으로 구성해 노동관계법과 이론은 물론 사법경찰로 수사실무까지 두루 갖출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 새로 확대되는 영역인, 전 국민 대상 노동교육은 어떻게 구상하고 있나.
“미조직 노동자, 자영업자를 위한 교육은 무엇보다 교육 대상을 모으기가 힘들다. 그래서 최소한의 노동법 상식과 사업주와 직원 간 갈등관리 기술 같은 ‘노동교육’스럽지 않은 노동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찾아가는 교육으로 실시할 생각이다.”

- 공무원이나 정규직처럼 교육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 노동교육에 접근할 기회 자체가 없을 것 같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교육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는 건 힘들다. 일당을 보전하거나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정부도 학습휴가권을 보장하는 측면에서 여러 제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5명 이상 사업장의 경우 연 1회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4대 법정의무교육(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 산업안전교육, 개인정보교육, 장애인인식개선교육)이 있다. 이런 4대 의무교육을 5명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하고 교육프로그램을 노동인권교육 세트로 묶어서 할 수 있도록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 사회적 대화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노동교육에 대한 다양한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사회적 대화가 가지는 비중에 비해 우리 사회의 이해도는 높지 않다. 그렇다 보니 (총연맹) 집행부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사회적 대화 향방이 갈린다. 사회적 대화뿐만 아니라 일자리에 대한 노조의 전략과 노사관계 교육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쌍용자동차의 위기는 평택이라는 도시의 위기다. 코로나19 이후 찾아올 전환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전략을 세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교육원의 예산과 인력이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독립기관으로 전환되고 새로운 사업목적이 부과됐는데도 예산과 인력은 부속기관이던 예년에 준해 맞춰져 있다.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다. 있는 예산을 짜내 일단 파일럿 스터디라도 해 보려 한다.”

- 사용자로서 보는 노동교육원의 노사관계는 어떤가.
“노동교육원에 노동부유관기관노조와 공무직으로 구성된 노조, 2개가 있다. 노동이사제는 할 수 없더라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합의 취지대로 노조 대표자가 이사회에 참관해 의견을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팀장·본부장 워크숍에 노조위원장이 참여해 함께 조직을 진단하고 사업을 구상했다. 올해 시설관리 파견·용역노동자 20명을 직접고용했는데 정규직노조가 선뜻 나서 줘 고마웠다. 어느 조직이나 갈등 자체가 없을 수는 없다.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고 해소하느냐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 일하는 사람 전체의 권리로 확대하자”

전태일 열사 50주기였던 올해, 우리는 노동자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전태일을 떠올리며 지난 50년간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 되물었다. 이 질문은 곧 지금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무엇이고,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를 의미한다. 노 원장은 “전태일 50주년 토론회에서 성취의 기쁨보다는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더 많았다”며 “87년 노동체제 이후 30년간 노조운동이 이룬 성과가 분명히 있지만, 노조 울타리 밖에서 다양한 노동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고 시선을 그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의 권리가 노동운동 내부나 일터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 전체의 것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나 노력이 없다면 노동을 바라보는 국민의 인식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민주노총이 얼마 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테이블에 오른 정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을 ‘역대 최악의 개악’이라고 하지만 정작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간극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민주노총 선거가 국민들에게 이토록 관심이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되새겨 봐야 한다는 말이다.

노 원장이 인터뷰에서 누누이 강조한 말은 ‘노동에 대한, 일하는 사람의 가치에 대한 인식전환’이다. 그것은 연대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인식의 전환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학습과 교육이 필요하다. 노 원장이 바라는 노동교육은 “일하는 사람 전체에 스며드는 노동교육”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노동교육의 미래를 물었다.

“노동교육이 좁은 의미의 노동조합교육이 돼서는 안 돼요. 일하는 사람들 전체의 교육이 돼야 합니다. 노동의 소중함과 가치 그리고 법·제도적 권리, 일의 책임이 함께 논의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죠. 미래는 전망이 아니라 꿈을 꾸고 실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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