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관계법 개정 논란이 거세지면서 이른바 ‘선 비준 후 입법’ 주장이 노동계 일각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2일 국회와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기국회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을 처리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임시국회를 통과하더라도 노동계가 반발하고 있는 정부안 중심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런 가운데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 계류된 ILO 기본협약 비준동의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법개정 방향을 놓고 이견이 큰 만큼 비준을 먼저 한 뒤 시간을 갖고 법개정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국제사회 지난해부터 “선 비준” 권고

정부는 지난해부터 비준과 입법을 동시에 추진해 왔다. 정부는 “동시 추진”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상 ‘선 입법 후 비준’ 방식이나 마찬가지다. ILO 기본협약과 국내법이 충돌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다.
반면 노동계와 학계 일각에서는 법 개정 없이 ILO 기본협약 비준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정부가 협약을 비준하면 1년 뒤에 발효되고, 헌법 6조에 따라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게 된다. 국내법과 충돌하더라도 신법 우선 원칙에 따라 기본협약을 우선 적용하면 된다는 논리다. 헌법 6조에 따르면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은 “ILO 사무국이 기본협약 비준과 관련해 한국에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 적 있는데, 기본협약 비준이란 ‘기본협약 원칙을 국내에 적용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라고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협약을 우선 비준한 뒤 국내법을 고쳐도 무방하다는 것이고, 국제사회도 그렇게 보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코린 바르가(Corinne Vargha) ILO 국제노동기준국장은 지난해 5월 국내 토론회에 보낸 영상메시지에서 “법제가 완벽해지고 모든 이해당사자가 만족할 때까지 비준을 미룬다면 노동권 보호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관행의 진전은 더욱 지체될 것”이라면서 한국 정부와 국회에 선 비준을 촉구하기도 했다.
선 비준 주장은 노동계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기본협약 비준시 나타날 혼란을 줄이기 위해 입법과 비준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법개정 방향을 놓고 이견이 크고,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 분쟁 해결이 시급한 상황에서는 국회 비준동의를 먼저 추진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선 입법’ 방식의 경우 많은 시간과 비용이 걸리는 단점도 있다. 정부는 지난해 20대 국회에서도 지금과 같은 내용의 노조법 개정과 ILO 기본협약 비준을 추진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도 국민의힘은 “노사가 모두 정부의 노조법 개정안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법안 처리에 미온적이다. ‘선 입법’ 방식으로는 기본협약 비준을 기약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현재 (이번 국회에서) 노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비준도 물 건너 가는 것처럼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 여당 의석이 176석인 만큼 정부가 의지만 있으면 이번 정기국회에서 조건 없는 기본협약 비준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 “입법공백, 현장혼란 우려”
한국노총 “노조법 독소조항 제거 뒤 처리해야”


정부측은 여전히 선 비준에 대해 고개를 젓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기본협약 비준을 먼저 하게 되면 헌법 6조에 의해 기본협약이 국내법의 효력을 갖게 되는데 그러면 기존 법률과 충돌이 일어나 현장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기본협약 효력이 발생하기 전인 1년 안에 국내법을 개정하면 혼란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이 관계자는 “그 고치기 어려운 법을 1년 안에 어떻게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냐”며 “1년 안에 법 개정이 안 되면 입법 공백이 생겨 현장에서는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계 내에서도 선 비준 방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다. 법 개정 없이 비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사업장 내 쟁의행위 제한 같은 노조법 개정안의 독소조항을 제거한 뒤 비준하자는 것이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기본협약 비준과 노조법 개정을 동시에 처리하되, 정부안을 그대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며 “ILO 기본협약에 미달되는 부분을 수정·보완해서 기본협약과 동시에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