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진희 서울청년진보당 부대표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와 서대문구 청년모임에서는 전태일을 기억하는 시간을 주제로 ‘<전태일 평전> 이어 읽기’ 사업을 했다. <전태일 평전>을 서대문구민 200여명이 1~2페이지씩 나눠 읽고 녹음해 오디오북으로 만드는 것인데 영화나 책을 통해 한 번은 들었을 법한 ‘전태일’을 하루하루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 주민들이 함께 기억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이 학습효과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듣긴 했지만 1~2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대목을 읽는데 왜 이렇게 또렷이 각인되는 것인지…. 책 한 권 전체를 정성스럽게 정독했을 때와는 또 다른 소감이 이어졌다. 자신이 맡은 대목을 낭독해 녹음파일을 보내 준 여러 명의 청년이 말했다.

“나에게 이 페이지를 낭독해 달라고 요청한 이유가 있어요? 왜 이렇게 그의 삶에 감정이입 되는 걸까요?” “나는 이제껏 전태일을 특별한 혁명가로만 생각했는데…. 그의 마지막 선택이 이해됐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정말 사랑했군요” 등등. 어떤 청년은 태일의 가족사를, 어떤 청년은 태일의 연애사를, 또 어떤 청년은 태일의 꿈을 자신의 입으로 읽어 내려갔다. 읽으면서 청년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춰 일기장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의 맥락을 고민했고 단어 사이사이의 빈틈을 고민하며 그 빈틈을 메웠다. 그렇기에 그 여운은 쉽사리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일은 다름 아닌 뒤풀이 때 생겼다.

감동적인 소감을 나눈 이후, 한 사람의 제안으로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제법 다양한 나이대 청년 10명이 자신의 노동 경험을 주제로 ‘진.진.가’라는 게임을 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 중 진짜 경험 두 가지와 가짜 경험 한 가지를 소개하고 어떤 경험이 가짜인지를 맞추는 게임이다.

아래 그날 소개된 경험 중 몇 가지를 나열했다.

5가지 중 하나만 가짜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들도 함께 추리해 보시길 바란다.

다만, 소개한 누군가의 경험은 나눴던 경험 중 매우 흔하게 벌어졌다고 답했던 것이었고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여성 청년 누군가의 경험이다.

① 공장에서 일하다가 내 앞에서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를 봤다. ② 카페에서 일하다가 유부남 사장님께 ‘나랑 사귈래’라는 제안을 받았다. ③ 예식장에서 일하다가 상무님이 사람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때렸다. ④ 백화점에서 일하다가 <시크릿가든>을 찍는 현빈을 만났다. ⑤ 인턴을 하다 상사가 얼굴에 서류를 던져 맞았다.

일하다가 배우 현빈을 만났다는 것이 가짜였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것에는 ‘반전’이 숨어 있었는데,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짜’였고 있어선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 ‘진짜’였다. 뉴스거리로 쓰일 것 같은 사건 사고들이 우리의 일상에는 흔하게 숨어 있었고 청년을 둘러싼 통계로는 해석할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또 다른 공통점도 찾을 수 있었는데 이력서에는 담을 수 없지만 스쳐 지나간 수많은 노동현장이 있었고 그곳에는 모두 노동조합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지금의 청년 세대는 교과서에서 노동자는 개별로 권리행사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을 통해 최소한의 선은 ‘정부’가 보장하고, 노동 3권은 ‘노동조합’을 통해 행사할 수 있다며 이를 배우고 암기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부보다 셈법이 빠른 기업가들이 ‘근로기준법’을 피해 갈 방법을 강구해 내거나 준법보다 벌금을 내는 게 더 싸게 먹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청년들은 노동 3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단체’도 가져본 적이 없어 오아시스 같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전전해야만 했다. 50여년 전 전태일에게는 근로기준법을 가르쳐 줄 ‘대학생 친구’가 절실했다면, 50년이 지난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근로기준법은 검색할 수 있어도 함께 싸울 수 있는 동료를 가지는 법을 몰라 ‘태일이와 그의 동료들, 노동조합하는 친구’들의 존재가 더욱 절실해졌다. 청년들이 현실에서 ‘전태일의 노동조합’을 만날 수 있게 되길 고대한다. 

서울청년진보당 부대표 (say_jin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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