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채은 청년유니온 위원장

“청년유니온도 집회를 하나요?”

청년유니온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노조로서 청년유니온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내가 청년유니온 임원에게 한 말이었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데, 당시 내 말이 놀라웠어서 기억에 남았다고, 그 임원이 나중에 말했다. 집회조차 생소했던 내가 지금은 기자회견장에서 구호를 외치는 노조 위원장이 됐다.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불꽃으로 돌아간 지 50주기가 되는 날이다. 전태일 정신은 그동안 한국 노동운동에 뿌리 깊은 바탕이 됐다. 하지만 노조도 잘 몰랐던 내가 전태일 정신에 대해 제대로 알 리 만무했다. 그나마 기억하고 있던 건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해설>을 안고 몸에 불이 붙은 채 숨진 것과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한자로 된 근로기준법을 읽지 못하는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들 두지 못해 원통해 했다는 것이었다.

전태일을 더 알고 싶어 책을 다시 들여다보고 25년 전 나왔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를 봤다. 영상으로 봐서 더 충격적이었던 건 시다들이 일하는 환경이었다. 폐병 걸릴 정도로 좁고 어두운 환경이라고는 들었지만 그렇게 낮고 침침한 곳에서 일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잠을 못 자게 하기 위해 사장이 직접 시다에게 주사를 놓기도 했다. 그런 시다들을 안타깝게 생각해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다 주던 측은지심이 가득한 전태일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의 외침은 간결했다. 정부도 노동청도 외면했던 그의 요구는 근로기준법을 지키고 환풍기를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어떨까. 적어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말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청년유니온이 여러 번 여론화했던 패션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들은 기자회견에서 “다른 것은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근로기준법만 지켜 주십시오” 라고 외쳤다. 패션어시의 모습이 그 시절 시다들과 많이 겹쳤는지,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여러 방면으로 패션어시를 조명하고자 하는 요청이 있었다. 참 감사하지만 이 시대의 ‘시다’들이 어디 패션어시뿐이겠는가.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무급휴직 상태였던 한 항공사 승무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가지고 있던 물건을 중고 상품으로 팔아 생활비를 마련할 만큼 생활도 빠듯했고 가족 부양의 짐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더 힘든 시기를 보냈을 그의 생활고에 마음이 먹먹했다. 50년 전에는 목표가 명확했다. 기업이 바뀌면 되고 정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온 사회가 마비된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 채 허허벌판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지금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전태일 정신을 해석해야 할까.

오늘날에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구직자 청년들이 있다. 내 주변 친구들은 졸업을 하기 전부터 대기업·중소기업 상관없이 수십 개의 이력서를 넣고 탈락의 고비를 마셨다고 했다. 또 어떤 직종은 채용이 결정되더라도 현장에 투입되기까지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을 대기하는 곳도 있다. 대기 중에는 백수로 있으면서 언제 일을 시작할지 모른 채 무기한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일을 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는 청년에게, 직장을 구했어도 일을 하지 못하는 청년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50년 전 그가 꿈꾼 태일피복은 적정 노동조건을 제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는 기업일 것이다. 딱 10년 전 청년유니온이 만들어질 때 구직자의 단결권을 이야기한 것처럼, 50년 전 청년 전태일을 기리며 오늘날 코로나 19시대에 청년의 일할 권리도 함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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