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1988년 11월13일은 일요일이었다. 당시 법정노동시간은 주 48시간, 토요일에도 출근하던 시절이었다. 토요일 근무를 마친 전국의 노동자들은 서울의 한 장소로 속속 모여들었다. 경찰이 봉쇄할 수 있다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흘렀고, 자본과 정권의 탄압을 뚫고 노동해방 새날을 개척해 나가는 전국의 동지가 한자리에 결집한다는 기대감으로 뜨겁게 타올랐다. 먼저 도착한 노동자들은 지방 대오가 도착할 때마다 함성과 구호와 노래로 열렬하게 환영했다. 현대중공업노조가 어둠을 뚫고 도착했을 때 환영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현대중공업노조는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주역이었다. 참가자들 상당수는 술잔을 기울이며 투쟁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추운 밤을 열기로 채웠다.

그렇게 연세대 노천극장의 날이 밝았고, 신명 나는 축제가 펼쳐졌다. 거제에서 구로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수만 노동자의 눈빛은 형형하게 타올랐다.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대오 속 노동자들은 무대에만 의존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었다. 연단에 오른 발언자가 포효하면 옳소! 투쟁! 등으로 화답하며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집회 사이사이 틈새마다 대오 속에서는 자발적인 구호도 터져 나왔다. 누군가 구호를 선창하면, 모두 우렁차게 따라 외쳤다. 무대와 대오 속에서 외치는 중심 구호는 두 개였다. 하나는 노동해방 쟁취, 또 하나는 전태일 정신 계승이었다. 그렇다. 1988년 11월13일 그날은 전태일이 분신항거한 지 18주기 되던 날이었고, 그 투쟁의 축제가 첫 전국노동자대회였다.

세계에는 모든 나라의 실천하는 노동자가 공유하는 대회가 있다. 매년 5월1일 어김없이 진행되는 메이데이 대회다. 대개의 국가에서 가장 성대한 노동자대회다. 그런데 한국은 전태일 기일에 맞춰 진행하는 전국노동자대회가 메이데이보다 더 큰 대회다. 민주노총도 그렇고 한국노총도 그렇다. 한국 노동운동에서 전태일의 위상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는 늘 한 장소에 모여서 진행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할 원칙이었다. 전국노동자대회를 사수하기 위해 산을 탔고, 화염병도 들었다. 그 대회를 분산해서 진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랬는데 무너졌다. 코로나19 때문이다. 무척 속이 상한다.

아동노동이 횡행하던 시대, 평균 열서넛 또래 어린 여성들이 평화시장 시다가 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배곯고 울던 시절, 그 슬픈 동심을 외면하지 않고 며칠 치 버스비를 탈탈 털어 풀빵을 사주고서, 자신도 장시간 노동에 지칠 대로 지친 밤늦은 시각 평화시장에서 집까지 12킬로 넘는 거리를 허청허청 걷고 뛰며 퇴근하다가 야간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에서 쪼그려 자기도 했던 청년. 정당하게 세금을 내고 시장에서도 인정받으며 사업주와 노동자가 동등하게 대우받는 모범업체를 꿈꿨던 선구자. 평화시장 노동조건을 개선하려고 동료 재단사를 모아 바보회·삼동회를 조직하고 설문조사·청원·홍보·대자보·집회 등 온갖 실천을 다 하고 모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진 실천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올해는 전태일 50주년이다.

한국에서 사람 이름이 들어간 다리는 거의 없다. 대표적인 것은 이순신대교다. 그리고 전태일다리가 있다. 전태일다리에는 노동자와 눈을 맞추는 동상이 서 있고, 노조·단체·가족·동아리·개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동판이 조성돼 있다. 초·중·고 수업시간에는 전태일을 주제로 학습을 한다. 중고생 대상으로 전태일 노동인권 현장 학습이 진행되기도 한다. 전태일이 잠들어 있는 마석 모란공원은 노동·시민사회 성지다. 재작년 서울에서 진행된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북측 선수단은 전태일 묘소를 참배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극장에서 상영됐고, <태일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만들어져 극장에서 상영될 것이다. <전태일평전>을 비롯해서 만화 <태일이>, 청소년용·아동용 전태일 등 삶과 죽음을 기리는 관련 서적이 계속 쏟아져 나온다. 어떤 출판사는 전태일을 5천년 한국사 100대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전태일평전>은 영어·일본어·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돼 읽힌다. 또 노동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전태일노동상이 있고,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청소년문학상이 있다. 청계천 2가에는 전태일기념관이 있고, 대구에서도 남산동 생가터를 매입해 전태일기념관을 만들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역사와 사회가 전태일을 기록하고 있다. 전태일에게 큰 빚을 졌기에 당연한 조치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과 시민사회와 양심적인 세력은 거기서 만족하면 안 된다. 전태일이 전태일로서 소중한 이유는 전태일의 정신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연대의 정신, 불굴의 실천정신과 아름다운 풀빵정신과 모범업체 실험정신이 여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갈수록 약화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11월13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제약이 있지만, 여기저기서 다양한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남은 기간, 각자의 시공간에서 전태일을 불러내자. 전태일을 불러내서 연대와 평등의 가치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 그리고 실천하자.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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