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CJ대한통운이 ‘물량축소 요청제’를 자사 표준계약서에 명문화하겠다고 28일 밝혔다. 택배기사가 대리점에 요청하거나 협의해 물량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택배노동계는 “최근 잇달아 발생한 과로사 추정 죽음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특수고용직인 택배기사에게 배송 건당 수수료는 곧 임금이다. 배송물량을 조정한다는 것은 수입 감소와 직결된다. 수입 감소를 감수하고 택배기사가 자발적으로 물량을 조정해 배송시간을 단축하도록 한 것인데, 낮은 수수료와 공짜 분류작업이 원인으로 지적된 택배기사의 과로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입 감소 감수하고 저녁 있는 삶 선택하라?”

CJ대한통운은 이날 ‘물량축소 요청제’ 명문화 계획을 밝히며 “택배기사들은 자발적 선택을 통해 배송물량을 줄이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와 함께 8월 택배기사 건강관리체계 재점검 용역을 실시해 연말까지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

노동계는 CJ대한통운의 행보가 택배기사 과로사 추정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봤다. 지난 5월4일 CJ대한통운 택배기사 정아무개(41)씨는 잠을 자다 돌연사했다. 코로나19로 부검이 지연돼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족과 동료는 고인이 코로나19로 물량이 폭증하자 매달 1만개 넘는 물량을 소화했던 점을 들어 과로사로 추정하고 있다. CJ대한통운 김해터미널 진례대리점에서 일하던 서형욱(47)씨도 지난 5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졌다. 택배연대노조는 서씨가 오전 7시에 출근해 12시간씩 일한 뒤 퇴근한 점을 들어 과로사라고 주장했다.

김인봉 전국택배노조 사무처장은 “물량축소 요청제가 실질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며 “수입과 직결돼 택배노동자가 물량을 포기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11년째 택배기사로 일하고 있는 이명수(46·가명)씨는 “배송량을 줄여 저녁 있는 삶을 만들겠다고 하지만 당장 수입이 줄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 물량을 놓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CJ대한통운의 표준계약서는 강제력은 없다. 택배기사는 개별 대리점과 업무위탁계약을 맺는데, 대리점이 CJ대한통운의 표준계약서를 참고해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다.

“근본문제 해결해 과로사 막아야”

택배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수수료와 공짜노동이라 부르는 분류작업 탓”이라고 입을 모았다. 울산지역에서 CJ대한통운 택배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지훈(48·가명)씨는 “택배 수수료는 계속 깎이고 있다”며 “1천50원을 받던 적도 있지만 현재는 800원 미만으로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수료가 낮아지니 택배기사는 배달을 더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명수씨는 “물류업계 출혈경쟁 탓에 단가가 낮아지고 있다”며 “대리점이 택배 수수료의 10~25%를 택배기사에게서 가져가니 기사는 하나라도 더 하려고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지난달 5천300여개의 물량을 소화하고 부가세와 대리점 수수료를 제외한 450만원을 손에 쥐었다. 식사시간을 반납하고 쫓기듯 일해서 번 금액이다. 그는 “식사는 시간이 없다 보니 잘 먹지 못한다”며 “간식거리를 아이스박스에 담아 신호에 걸릴 때 조금씩 꺼내 먹는다”고 전했다. 박성기 공공운수노조 택배지부장은 “택배노동자의 본업은 집·배송으로 과로사를 예방하려면 무임금 분류시간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택배 물량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며 “이전에는 물량이 늘면 택배기사들이 물량을 내놓아 신규 기사들이 많이 진입했는데 최근에는 배송구역이 좁아지고 효율성이 높아지니 물량이 크게 늘어도 개인이 가족과 알바를 써서 일을 하려는 상황이 늘었다”고 ‘물량축소 요청제’ 명문화 배경을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하고 현장에서 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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