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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52] 타협 없는 자유인, 독립운동가 한용운 ②이영경 작가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속 한용운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


1919년 1월부터 천도교·기독교·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만세 거사가 계획되고 있었다. 2월 말 천도교의 최린을 만나 3·1운동 계획을 들은 만해는 즉시 승낙했다. 최린과는 이미 일본에서의 인연으로 돈독한 사이였다.

그는 불교계 동원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러나 산간지방에 있는 선승들에게 연락을 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결국 서울 종로3가 대각사 백용성의 서명만을 받아 낼 수 있었다. 33인 중 불교계는 2명에 불과했지만 불교계의 참여로 종교계 연합전선은 나름의 모양을 갖추게 됐다.

한용운은 독립선언서 작성에도 함께했다. 그는 학자의 길을 가겠다며 서명이나 직접 참여를 거부한 최남선에게 선언서 기초를 맡기는 것을 반대하고 자신이 쓰겠노라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선언서의 명칭을 ‘독립청원서’로 하자는 최남선의 주장을 꺾고 ‘독립선언서“로 확정했으며 최남선의 초고에 가필을 해 ‘공약 3장’을 추가했다. 최남선의 초고가 온건한 반면 공약 3장은 실천적이며 의지가 뚜렷하게 담겨 있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한 공약 3장2항은 33인의 취조·재판 과정에서 내란죄 죄목이 되기도 했다.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 위해 같은해 2월28일 밤, 보성사 사장 이종일에게 3천매를 건네받아 계동의 자택에서 학생들을 소집했다. 이들은 불교중앙학림 학생(현 동국대) 학생들로 백성욱·김대용·오택언·김봉신·김범린 등 소위 ‘유심회’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선언서를 각 지역에 배포하기로 했다.

3월1일,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불교계의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됐다.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서 낭독식에도 수많은 승려와 신도, 학생들이 참가했다.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대구 동화사 등 주요 사찰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특히 범어사를 중심으로 부산 동래 일원에서 일어난 만세시위가 가장 규모가 컸다. 이는 한용운이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을 통해 3·1 만세시위를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3월1일 오후 2시, 불상사를 걱정해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해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3월1일 종로 태화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거사 후에 일본경찰에게 잡혀갔다. 당시 최고형이던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년6개월 만인 1921년 12월22일 풀려났다. 수감 중 유명한 <조선 독립의 서>를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서로 제출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일부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거나 고문이 두려워 울부짖는 등 나약한 모습을 보이자 분노하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수감 당일부터 취조가 시작됐다. 경무총감부에서 1차 취조를 당한 뒤 민족대표들은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곳에서 다시 몇 차례의 심문을 거쳐 4월4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됐다. 예심 재판부는 민족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극형에 처할 방침이었다. 재판부는 특히 ‘공약 3장’의 2항 가운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대목을 문제 삼았다. 이는 민중폭동을 선동한 것이 아니냐며 8월 상순 재판 분위기를 바꿨다. 일본 제국의회에서는 조선인의 반감을 우려한 나머지 이들에게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기됐고 이는 재판에 반영됐다. 고등법원은 내란죄 대신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명목으로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으로 환송했다.

거사 직후에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양한묵은 수감생활 중 옥사했다.

1919년 3월11일 일본인 검사는 심문을 끝내면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그렇다. 계속해서 어디까지든지 할 것이다. 반드시 독립은 성취될 것이다”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한용운의 이 같은 의지는 흔들린 적이 없었다. 5월8일, 경성지방법원의 판사 또한 같은 질문을 했다. “피고는 금후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하고. 한용운은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고 대답했다.

그는 법정에 설 때면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하오” “우리들의 행동은 너희들의 치안유지법에 비춰 보면 하나의 죄가 성립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고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 같은 한용운의 법정투쟁 소식은 지상에 보도돼 두루 알려짐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치열하고 격조 있는 옥중투쟁

3년간의 옥중생활에서 한용운는 의연했다. 그는 3월1일 강조한 대로 사식·보석과 변호사에 대한 거부를 실천했다. 그의 투쟁방식이 늘 과격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추운 마룻바닥이 선방인 양 허리를 곧추세우고 시문으로 의지를 전하기도 했다.

1919년 7월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한용운은 검사의 심문에 대하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장편의 논설을 썼다. 글의 전문은 접고 또 접어서 종이끈이 돼 멀리 상해까지 전달됐다. 이 논설은 1919년 11월4일 상해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최행복이라’로 시작되는 이 논설은 조리가 명백하고 기세가 웅건해 상해의 독립투사들에게 많은 힘이 됐다. 옥중에서 쓴 14편의 시도 또 다른 격조가 엿보인다. 때로는 서정적으로, 때로는 자유에 대한 찬양으로, 때로는 동지에 대한 격려로 그의 시들은 삭막한 감방 속에서 동지의 심금을 울렸다. 먼저 출감하는 오랜 벗 최린을 위한 시에는 아직은 한매(寒梅) 한 그루로 표현되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 함께 가자는 동지적 다짐이 잘 드러나 있다.

“어여쁜 꽃을 모두 다 보고(看盡百花正可愛)

안갯속 향기로운 풀 이리저리 다 누볐다(縱橫芳草踏烟霞)

한 나무 매화꽃은 아직 못 가졌는데(一樹寒梅將不得)

천지에 가득 찬 눈바람 그 어찌할꼬(其如滿地風雲何)”

신간회 활동, 넓어진 시야

출옥한 뒤에도 만해의 투쟁은 계속됐다. 1922년 전국적으로 확산된 조선물산 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4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의 총재로서 그의 소신인 그는 불교계의 유신과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사찰령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더불어 조선 사회 전체와 그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조선 민족의 고통에 대한 통찰이 깊어졌다. 이러한 변화가 사회적 활동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1927년 2월 설립된 신간회를 통해서였다. 신간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아우르는 민족적 단일단체였다. 만해는 불교계 대표로서 경성지회장에 선출돼 노동자·청년·농민, 그리고 여성의 지위향상과 관련된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글을 발표하며 경성지회의 활동을 지원했다. 경성지회장을 그만둔 뒤에도 1929년 11월3일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자 민중대회 연사로 활동했지만 신간회는 집회 불허라는 일제의 견제와 민족주의·사회주의 양쪽의 갈등으로 1931년 5월 해소됐다. 많은 회원들이 해소에 반대한 것처럼 만해 역시 신간회 역할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해소를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해소 후에는 신간회를 대신할 새로운 항일단체가 설립돼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신간회 활동에서 형성된 현실인식은 불교청년운동으로 이어졌다. 불교계와 조선 사회가 둘이 아니며, 불교의 개선은 곧 조선 사회 개선이라는 인식이 신간회에서의 실천을 통해 체화된 것이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항일단체를 만들고자 하는 만해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조선 사회 발전을 위한 계몽운동을 꾸준히 계속됐다.

▲ 이영경 작가

심우장의 자유인

어느날 백양사의 김벽산이 만해를 찾았다.

“내가 이렇게 되지 못하게도…. 집 한 칸을 마련하려고 생각하오. 한심한 일이지만.”

한용운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잘 됐습니다. 내가 집을 지으려고 사둔 땅이 있습니다.”

그를 매수하기 위해 식산은행이 국유지를 주겠다는 걸 매몰차게 거절했던 사연을 잘 아는 벽산인지라 냉큼 대답했다.

벽산이 보여준 땅은 성북동 골짜기의 양지 바른 곳이었다. 설계는 수학교사 최규동이 기꺼이 맡았다.

“내 부탁이 하나 있소. 집은 북향으로 설계해 주시오. 총독부를 마주하고 살 수는 없잖소!”

최규동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이 지어진 뒤 만해는 53세의 나이로 신부 한숙원을 맞이했다.

금혼은 방편일 뿐이며 불도의 궁극적 경지는 아니라며 승려의 결혼의 자유를 주장해 많은 적을 만들었던 만해였다. 그는 그의 주장을 당당히 실천하며 10년을 심우장에서 살았다. 1944년 6월29일 그는 눈을 감았다. 조선총독부의 특별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효 중이었다.

심우장의 짧은 볕 속에서 호적을 거부해 배급조차 받을 수 없었던 그는 궁핍으로 인한 신경통·각기증·영양실조로 숨을 거뒀으나 진정 자유인이었다.

이영경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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